만삭인 캄보디아인 아내를 교통사고로 위장,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이 보험금 지급 소송에서 잇따라 이겼다. A씨가 아내 앞으로 들어놓은 보험금 약 100억원을 모두 받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 8일 서울고법 민사9부는 A씨(53)가 삼성생명보험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금 청구 소송 2심에서 “일시금으로 A씨에게 2억200만원을, 이씨 자녀에게 60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며 1심과 같이 원고 승소 판결했다. 정기지급금으로는 오는 2055년 6월까지 A씨와 딸에게 매달 6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했다. 보험사가 이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총액은 약 31억원이다.
A씨는 지난달 23일 교보생명보험을 상대로 한 2심에서도 승소했다. 서울고법 민사13부는 1심과 동일하게 “교보생명보험이 A씨에게 2억3000만원을, 자녀에게는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A씨가 보험금 부정 취득 목적으로 보험 계약을 했다거나 고의로 사고를 일으켜 배우자를 살해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범행 동기가 선명하지 못하다고도 덧붙였다.
대법원도 남편 손 들어줘…“보험금 부정 취득·고의 살해로 보기에 증거 부족”
같은달 새마을금고중앙회를 상대로 낸 2억1000만원 상당의 소송의 경우, 대법원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A씨 손을 들어줬다. A씨가 제기한 보험금 소송 중 판결이 확정된 첫 사례다.
재판부는 “이씨가 보험금을 부정 취득할 목적으로 보험 계약을 맺었거나 고의로 교통사고를 일으켜 아내를 살해했다고 인정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며 1·2심 판결에 오해가 없다고 판단했다.
새마을금고는 △A씨가 부정한 목적으로 다수의 보험에 가입했고 △고의로 교통사고를 냈으며 △피보험자인 캄보디아인 아내가 계약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해당 보험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A씨가 악성 부채를 부담하고 있었다는 뚜렷한 사정이 없고 △생활용품점 수입 등을 고려할 때 보험료 부담을 감당할 만한 경제적 상황이었으며 △아내 뿐 아니라 부모와 딸 등 가족들의 보험을 다수 가입한 점을 들어 부정한 목적의 보험 계약이란 보험사의 주장을 기각했다.
형사재판서 살인 무죄…“고의 살인 의심되지만, 檢 제대로 입증 못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A씨는 지난 2014년 8월 경부고속도로 천안나들목 인근에서 승합차를 몰다가 갓길에 정차돼 있던 화물차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동승자였던 캄보디아인 아내 B씨(당시 24세)가 숨졌다. B씨는 임신 7개월이었다.검찰은 A씨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아내를 피보험자로, 본인을 수익자로 해서 11개 보험사에 보험 25개에 가입했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겼다. A씨가 체결한 보험금은 원금만 95억원 수준이었다. 지연이자까지 합치면 100억원이 넘는다.
한 달에 A씨가 아내 앞으로 든 보험료로 낸 돈만 360만원. 일부 계약은 아내가 사망하기 두 달 전 A씨 경제적 여건이 나빠졌을 때 체결된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졸음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숨진 아내 혈흔에서 수면유도제 성분이 검출된 점, 졸음운전으로 보기 어려운 정황 등을 근거로 살인·보험금 청구 사기 등 혐의를 적용, A씨를 기소했다.
A씨에 대한 형사사건 재판은 1심 무죄, 2심 무기징역을 거쳐 대법원까지 갔지만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막대한 보험금과 보험료, 구호조치 미실시, 유족이 국내에 온다고 했는데도 사고 3일 만에 화장한 부분 등 의심이 가는 정황은 많았다. 대법원은 “고의 살인이 의심된다”면서도 “‘졸음운전으로 사고가 났다’는 A씨 주장을 검사가 충분히 반박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파기환송심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사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이후 2021년 3월 재상고심에서 살인과 사기 혐의는 무죄가 확정됐다.
“보험금 다 받아갈 가능성 높다”…대법원 판결 무시 못해
형사사건에서 A씨가 무죄가 나오면서 A씨가 보험금을 지급해 달라며 보험사 11곳을 상대로 냈던 소송도 진행되기 시작했다.
총 11건 민사소송 중 새마을금고중앙회 소송만 대법원에서 확정됐고 대다수는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메리츠화재해상보험만 항소하지 않아 A씨의 승소가 확정됐다.
보험사마다 1심 판결은 엇갈린다. A씨는 미래에셋생명보험, 라이나생명보험, 흥국화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는 1심 패소했다.
관건은 외국 국적의 숨진 B씨가 생명보험을 ‘제대로 알고’ 계약했는지 여부다. A씨 측 손을 들어준 8개 사건에서는 “B씨가 한국어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판단한 반면, 다른 3개 사건은 “B씨가 계약 체결 내용을 이해하고 진정한 의사로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며 보험 계약을 무효로 봤다.
법조계에서는 A씨가 다른 보험금 소송에서도 결국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만큼 하급심에서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경일 법무법인 L&L 변호사는 “지금 상황으로는 A씨가 보험금을 다 받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원래는 형사와 민사를 별개로 본다. 형사에서 유죄 판결이 났다고 해도 민사에서 따로 유무죄를 다투는데 통상 보험금 청구 사건에 있어서는 형사와 민사가 비슷하게 가는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법원이 보험금 지급 방향으로 정리를 했기 때문에 1심과 2심 법원이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다투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며 “형사재판에서 남편이 고의로 교통사고를 냈다는 점을 검찰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입증하지 못한 탓에, 과실이 돼버린 사건이다. 결국 보험금을 다 지급하면 보험료가 올라가는 등 선량한 가입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가기 때문에 우려가 된다”고 설명했다.
한 업계 관계자 역시 “재판부가 판단할 때 판례가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지 않나”라며 “법원에서도 통일성 있는 법원 판결을 내야 할 필요성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금고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뒤 보험사들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A씨의 승소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이 사실”이라고 부연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