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예산 삭감으로 학계와 산업계가 시끌벅적하다. R&D란 ‘연구’와 ‘개발’을 합친 용어다. 그동안 연구는 많았으나 개발도 그만큼 충족되었는지 의문이다. 국가 R&D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자체가 애당초 무리라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반면, 과학기술계는 예산 삭감 저지를 위한 연대를 선언하는 등 조직적 반발을 예고한다. 과학기술계는 정부의 예산 삭감뿐만 아니라 상대평가 도입 같은 파격 조치가 당사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현장과 따로 논다고 비판한다. 이런 지적도 귀담아들을 부분이 있다.
둘 다 옳다는 식의 양시론, 양비론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꼬인 매듭을 풀자면 뒤엉킨 모양새를 주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본질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로 가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밟아보자.
첫 번째는 국민 눈높이에서 볼 부분이 있다. 국가 R&D는 일반 국민과 관계없는 전문가 집단이나 소위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돼왔다. 일부 특정 그룹을 중심으로 심사하고, 제안했다. 그러다 보니 나눠 먹기라는 지적과 의심을 늘 받아 왔고, 실제 감사 결과에서 치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물론 드러나지 않은 물밑의 내용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국가 예산을 쓰는 연구와 개발은 국민의 행복 수준을 높이고 국가 경제에 이바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수요자인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면밀하게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두 번째는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하는 정부 부처와 담당 공무원의 접근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획일성’이 가장 큰 암초다. 공무원들은 예산을 획일적인 비율로 일괄 삭감한다. 이번 국가 R&D 예산 삭감도 예외 없이 이런 패턴을 따랐다. 연구 중에는 뚜렷한 성과를 내는 경우도 있고, 완료를 눈앞에 둔 경우도 있다.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특수한 사정을 가진 연구도 있게 마련이다. 공무원은 특수성이 작용하는 사업에 보편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저것 따지고 기준을 정하면 이해관계자들이 반발한다는 점, 또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가장 쉬운 방법인 획일성에 의존한다.
이런 획일성은 정책 결정의 수용도를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건 모두가 적당히 또다시 나눠 먹거나 아니면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획일성은 전문성 결여의 산물이다. 공무원이 R&D 관련 모든 분야의 전문성을 가질 수는 없다. 적어도 해당 사업의 심사 절차와 방법, 관리, 운영의 측면에서의 전문성은 갖춰야 한다. 전문성 부족은 공무원 순환보직 시스템이 갖는 고질적인 흠결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국가 R&D가 학계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산업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연구 보고서는 산업 현장과 동떨어진 반쪽 짜리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이를 개선하고자 1998년 한국산학연협회가 출범했지만 2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산업 현장의 참여는 형식적인 끼워넣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 적당한 규모의 기업을 등장시켜 명의를 차용하거나, 장비 구매 지출 등에 역할을 제한하는 식으로 기업은 동원될 뿐이었다.
주어진 예산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도 과학기술계의 숙제다. R&D 아이템 선정과 사업 규모 조정 관련 심사 방법을 대폭 개선해야 한다. 이해관계자와 전문가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업 수요 조사도 설문 방식을 통해 민간과 국민의 수요를 다양하게 수렴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심의와 관리 영역에는 신기술 개발 전문가, 이것을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회계 전문가, 투자 전문가, 금융권 인사 등 전문 인력을 전방위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은 AI, 양자컴퓨터 등 기술의 퀀텀 점프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런 변화하는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을까? 국가 R&D 사업의 일대 혁신은 응전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R&D 경쟁력의 잣대를 ‘투자의 규모’가 아닌 ‘내용의 규모’로 점프하는 일부터 시작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