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저지 ‘최후 보루’ 된 의평원…의정 갈등 새 국면

의대 증원 저지 ‘최후 보루’ 된 의평원…의정 갈등 새 국면

기사승인 2024-07-09 11:00:08
서울의 한 의과대학 전경. 쿠키뉴스 자료사진

의과대학 교육의 질을 평가·인증하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의 독립성을 두고 의료계와 정부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교육부 차관이 의평원장을 향해 “근거 없이 교육의 질 저하를 예단한다”고 공개 비판하면서 의정 갈등은 새 국면을 맞게 됐다. 의평원마저 흔들리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위기감이 의료계에서 감지된다.

9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대 교육 문제를 놓고 의평원과 교육부가 빚은 마찰이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앞서 의평원 원장은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인해 교육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고, 이에 교육부 차관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평원은 의대 교육 과정을 평가·인증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비영리 민간단체로, 각 의대는 주기적으로 교육 수준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정부가 내년도 의대 정원을 기존 정원 대비 1497명 늘린 가운데 의평원은 내년 입학 정원이 10% 이상 늘어난 대학들로부터 주요 변화 계획서를 제출받아 평가할 예정이다. 평가 결과는 의대 인증 절차로 이어진다. 내년도 입학 정원이 늘어난 32개 의대 중 30곳이 인증 평가 대상이다. 인증을 받지 못한 의대는 신입생 모집이 정지되거나 학생들의 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이 제한될 수 있다.

의료계는 급격한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의학교육의 질이 떨어져 수준 이하의 의사가 배출되고, 서남의대처럼 부실 의대가 양산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25학년도 정원이 10% 이상 증가한 대학 30곳 모두 현 교육 여건으로는 주요 변화 평가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의평원 조사 결과도 나온 바 있다.

정부의 의평원 압박 이후 의료계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다. 전국 31개 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및 교수협의회(이하 비대위)는 8일 공동 성명을 내고 “정부는 부실한 의학교육 여건에 아랑곳없이 대학이 무조건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뜯어고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의대 정원은 국민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장기적인 계획에 의해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결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이라도 의대 교수들과 진지하게 논의하고 협의하기 위한 대화 테이블을 마련해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교육부의 의평원 평가·인증 개입 논란에 대해선 “교육부 산하 인정기관심의위원회를 통한 의평원의 독립성 침해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교육부는 지난 5월 의평원을 ‘고등교육 프로그램 평가·인증 인정기관’으로 다시 지정하면서 재지정 조건을 담은 공문을 의평원에 발송했다. 재지정 조건에는 ‘주요 변화 계획서 평가, 중간 평가를 포함한 평가·인증의 기준⋅방법⋅절차 등을 변경할 때 교육부 인정기관심의위에서 사전심의를 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의평원은 수용할 수 없다며 교육부에 이의를 제기한 상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여기에 더해 교육부가 의평원 이사회 구성을 환자단체 등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자 의료계는 발끈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대한의학회,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지난 7일 낸 공동 입장문을 통해 “의평원은 교육할 준비가 잘 된 대학을 아무런 근거 없이 승인하지 않을 기관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현재 의평원 이사회에는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을 비롯한 비(非)의료계 인사가 4명 들어가 있는 등 의사가 아닌 구성원이 해외와 비교해 많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총 22명으로 이뤄진 의평원 이사회는 정부 대표와 교육·언론·법조계 각각 1명씩을 제외하고 나머지 18명의 당연직 이사가 의료계 인사로 채워져 있다.

의료계가 정부로부터 의평원을 사수하는 이유는 의평원이 의대 증원을 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장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의평원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의학교육 평가 기관으로서 우리나라 의사의 최소한의 실력을 담보하는, 국민 건강 수호의 최후의 보루”라며 “의평원을 흔들려는 모든 시도는 국민 건강을 해치려는 의도로 봐야한다”고 짚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은 정부가 의평원이라는 의료계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의사들이 분노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회장은 “그동안 의사들이 의평원의 부족한 부분을 비판하면서도 양질의 의학교육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위해 의평원을 지원해왔는데 정부가 이를 무시하면서 의료계의 자존심을 긁게 됐다”며 “전문성에 대한 인정과 신뢰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지금 정부의 대처에선 그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의료계도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인한 교육의 질 저하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증원된 정원에 맞춰 의학교육 환경을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심민철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은 8일 정례브리핑에서 “의학 교육의 질을 향상해야 한다는 목표에 대해선 정부와 의료계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의대 교수 등 의료계가 의평원을 압박하지 말라며 잇따라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선 “서로 오해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 접점을 찾아가는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전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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