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 해법을 두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대통령실이 한 대표의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 제안을 거부하자, 한 대표가 정면으로 “민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맞서면서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닫는 분위기다. 공식적으로 양측은 당정 갈등을 일제히 부인했지만, 윤 대통령이 임기 중 처음으로 여당 연찬회에 불참하는 등 윤·한 갈등 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온다.
양측의 불협화음이 수면 위로 떠오른 시점은 지난 25일이었다. 한 대표는 이날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대통령실에 2026학년도 의과대학 정원 증원 유예를 제안했다. 국민의 의료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전공의를 복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입장에서다. 이후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27일 국회 운영위에 출석해 “기존 입장에서 변한 것이 없다”며 수용 불가 입장을 밝히자, 한 대표는 같은 날 “국민 건강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덜어드리기 위해 해결책이 필요하다”며 유예안 수용을 거듭 압박했다.
대통령실은 28일 “사실상 의대 정원 증원을 하지 말자는 것”, “현실적이지 않다”라는 등 강경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2026학년도 정원을 확정해 공표한 만큼 증원을 유예할 경우 입시 현장에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도 우려했다. 이에 한 대표도 ‘민심’을 거론하며 증원 유예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것이 정답인지만 생각하면 된다. 대단히 중요한 이슈이고, 거기에 대해 당이 민심을 전하고 민심에 맞는 의견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9일에는 “민심을 다양하게 들어본 결과 (응급실과 수술실 등) 현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며 “의료 개혁의 동력은 국민이다. 의료개혁 추진 과정에서 국민의 걱정, 불안감도 잘 듣고 반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가 물러서지 않는 배경에는 “당이 민심에 더 예민하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응급실 의사 부족 등 곳곳에서 나타나는 최악의 의료대란 징후가 현실화할 경우, 후폭풍은 여당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미 한 차례 의정갈등 악재를 겪은 상태다. 지난 4·10 총선 당시,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은 여당에 막판 변수로 작용했다. 초반엔 정부의 확고한 증원 방침으로 지지를 얻었지만, 의료 대란이 장기화하자 국민들의 피로도는 커졌다. 당시 한동훈 위원장은 “숫자에 매몰될 문제는 아니다”며 대통령실에 전향적인 입장 전환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기존 입장을 밀어붙였다. 정부의 일방통행식 정책은 필수의료 공백 상황을 낳고, 결과는 총선 완패로 돌아왔다. 현재 당내에서도 “의정갈등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 해결책이 필요하다”, “원칙만 고수할 게 아니라 여론이 더 악화하기 전에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불만이 흘러나오고 있다.
문제는 윤 대통령도 협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인력 추가 양성이 늦어지면 지역·필수의료 붕괴를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다. 국민의 생명권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피해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의료계 반발에 쉽게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게 윤 대통령의 입장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29일 회견에서도 의료 공백 관련 질문에 “의료개혁을 멈출 수 없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가중되는 의료대란 우려에는 “비상의료체계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의료인을 더 양성하는 문제는 최소 10∼15년이 걸리는 일이다. 부득이하게 이제 할 수밖에 없다”며 의대 증원 등 정부의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의대 증원을 계획대로 진행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한 대표와 윤 대통령이 한치의 물러섬 없이 이견을 빚자, 윤·한 갈등이 재점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용산 대통령실과 한동훈 지도부 사이에 감정 섞인 신경전이 오가는 등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면서다. 대통령실은 오는 30일 예정됐던 윤 대통령과 한동훈 지도부의 만찬을 돌연 추석 이후로 연기했다. 대통령실은 당 지도부와 협의한 후 일정을 미뤘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복지위 소속 당 의원들과 회동한 뒤 기자들과 만나 “제가 이야기 들은 것은 없다”고 일축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여당 연찬회에도 불참했다. 한 대표는 연찬회에서 정부와 대통령실이 진행한 ‘의료개혁’ 보고 때 자리를 떴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 모두 공식적으로 ‘당정 갈등’ 우려에는 선을 긋고 있다. 윤 대통령은 회견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게 자유민주주의”라며 “당정 간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고, 한 대표는 “당정 갈등 프레임은 낄 자리가 없고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의료공백 관련 여론을 살피면서 정부와 대통령실 설득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내 상황이 녹록치 않은 점이 변수다. 당장 원내사령탑인 추경호 원내대표는 지난 28일 “의료개혁은 윤석열정부의 중요한 과제다. 저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진행이 돼야 한다는 데 대해 정부의 추진 방침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당도 함께할 생각”이라고 용산에 힘을 실어줬다. 또 “유예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사전에 심도 있게 상의한 적은 없다”며 한 대표의 중재안이 원내 지도부와 상의 없이 나왔다는 점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