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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등 의료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을 이탈한지 1년째, 환자를 보고 있는 간호사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의사 업무를 간호사에게 떠넘기는가 하면 충분한 교육 없이 현장에 투입되면서 자칫 환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18일 전공의 집단 사직 1년을 맞아 서울대병원 암병원 서성환홀에서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국립대·사립대병원 노동자(의사, 관리직 제외) 848명을 대상으로 작년 12월 한 달 동안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조사 결과, 진료지원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 일반간호사 402명 중 44%는 전공의 이탈 전 의사 업무인 복합드레싱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탈 후에는 이 비율이 47.5%로 증가했다. 간호사 업무 범위를 벗어난 추가 업무가 늘어났다는 비율은 70%에 달했다.
전공의 이탈 후 병원에선 환자가 감소했다. 이에 간호사 수를 줄이고 의사 업무를 떠맡기는 등 노동자들의 근무 강도는 높아졌다. 진료지원 간호사(PA간호사)는 충분한 교육 없이 현장에 투입됐다. PA간호사 78명 중 43%는 “일방적 부서 배치·발령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진료지원 업무를 맡게 됐다”고 응답했다.
정부의 간호사 업무 시범사업에선 일반간호사를 전담간호사로 전환할 경우 3년 이상의 임상 경력 보유자로 한정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나, 조사에 참여한 PA간호사의 10%는 임상경력이 3년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배치 전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간호사도 있다. 전담간호사 47%는 이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답했고, 59%는 업무에 따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가장 큰 어려움으로 ‘업무 책임 소재 불분명으로 인한 불안감’(79%)을 꼽았다.
조중래 의료연대본부 경북대병원분회장은 “전공의 업무를 일방적으로 하달 받아 일단은 하고 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의사가 하던 업무에 내던져진 간호사들의 고충을 간호부도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조 분회장은 “의사에게만 허용됐던 일부 의료행위가 간호사에게 허용됐는데 학교에서 배운 적도, 병원 들어와서 해본 적 없는 의사의 업무를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며 “진료지원 간호사들은 80시간의 교육을 받도록 돼 있지만 현재 그럴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준비되지 않은 간호사들이 현장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가 환자들을 위험에 빠뜨릴까봐 걱정된다”면서 “수술과 진료가 취소되고 신규환자 접수가 안 되는 진료과가 생기는 것을 보면 지역의료의 붕괴가 눈앞까지 다가온 것처럼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실제 전공의 집단 이탈로 외래진료, 입원 수술이 축소·지연되면서 환자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간호직 132명 중 32%는 “환자 안전사고가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제주대병원의 경우엔 지난 1월 임신 29주 된 임신부가 조산 위험으로 병원 응급실을 방문했으나, 신생아 중환자실 병상이 부족해 순천에 있는 한 병원으로 헬기를 이용해 긴급 전원된 바 있다. 또 응급실에 온 환자 중 손가락, 발가락 등이 절단됐을 때 봉합하는 수족지접합 시술과 안과 응급 수술 등 중증·응급환자 진료가 어려운 여건이다.
신동훈 의료연대본부 제주대병원분회장은 “제주대병원 의사 정원은 337명이지만 근무하는 의사 수는 195명으로 정원의 57%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라며 “의정갈등으로 인해 제주대병원의 의료서비스가 제한되면서 도민들은 필요한 서비스를 제때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조차 경력 간호사들이 의사 업무를 대신하면서 병동에는 저연차 간호사들만 남아 있는 상태다. 서울대병원은 작년 4월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직원들의 무급휴가를 권고한 바 있다. 권지은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 선전부장은 “병원을 정상화시키겠다며 전공의들을 설득하러 바쁘게 움직인다던 병원장과 간호부는 의사 업무를 떠넘겼다”면서 “처음엔 소변줄 삽입으로 시작했으나 보호자 동의서 받기, 중심정맥관 제거 등의 업무가 하나씩 늘어가더니 이제는 오더 넣는 것까지 시킨다. 병실에서 간호사끼리 오더를 내고 처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에 따라 앞으로 중증도 높은 환자들을 병원에서 돌봐야 하는데 환자 곁을 지켜야 할 인력은 3년차 미만의 간호사들”이라며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나이팅게일 선서가 무색하지 않게 병원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일하고 싶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