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7)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7)

밀레, 반 고흐, 리히텐슈타인의 <씨뿌리는 사람>

기사승인 2025-07-14 09:58:09
장 프랑수아 밀레, 자화상, 약 1840~ 41, 캔버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는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Greviln) 교구에 속한 작은 농촌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8남매의 둘째인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적극적이고 지혜롭고 열정적인 할머니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할머니는 강인한 농부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가족에 애착을 쏟으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를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신중하고 종교적인 성품으로 조그만 의심이 생기면 교구신부님과 의논하는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다. 밀레는 할머니가 원장 수녀 같다고 죽는 날 마지막까지 기억했다. 

밀레의 아버지는 성가대를 지휘하며 생각이 깊고, 진흙으로 조각을 빚고 나무에 새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남편의 말에 복종하며 평생 일 밖에 몰랐다. 밀레는 초등학교 이후 고전 문학과 당대 문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도서관에서 늘 책을 가까이 하였다. 

이 <자화상>은 작가가 26살 때 그린 두 점의 자화상 중 한 점이다. 빛과 그림자의 강한 대비가 그의 얼굴에 드리우고 신중한 느낌을 준다. 날카로운 시선은 밀레가 선택한 목표를 추구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 강렬함은 또한 파리에서 만난 낭만주의 화가들의 영향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 그레빌의 성당, 1871~1874, 캔버스에 유채, 60x73.4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1875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한 밀레가 보불전쟁을 피해 고향 노르망디의 그레빌의 성당을 그린 말년의 작품이다. 화가로서의 출발은 1835년 그뤼시에서 가까운 셰르브르(Cherbourg)에서였다. 청순한 카트린 드뇌부의 데뷰작인 <쉘브르의 우산, 1964>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시다.  

밀레는 1837년 시의 장학금으로 파리 에콜보자르(Ecole des Beaux-Arts, 국립 미술 학교)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의 화실에서 공부를 하였다. 1839년 로마 상(Prix de Rome)에 탈락하자 학교를 떠난다.

1840년, 살롱에 계속 떨어지다 초상화 한 점이 당선되자 초상화가로 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후 파리와 셰르부르를 오가며 초상화와 로코코 풍의 목가적인 그림과 누드를 주로 그렸으나 평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렸다.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 캔버스에 유채, 101.6x82.6cm, 보스턴 미술관 

인간, 삶의 본질을 그리다

미국의 3대 미술관인 보스턴 미술관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이 바로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이었다. 밀레는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이자 바르비종 화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라고 미술 시간에 배운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만큼 우리가 사랑하는 화가이다. 

추운 11월의 황혼, 경사진 땅에서 농부가 겨울밀을 뿌리고 있다. 그의 뒤에는 소가 끄는 해로우(harrow)가 밀 위에 흙을 덮고 있다. 장엄한 풍경 속, 거대한 인물이 묵묵히 대지를 일군다. 프랑스 작가이자 문학 비평가인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 1811~1872)는 “이 남자의 거친 동작 속에는 웅장함과 기품이 서려 있다.”라 평했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인 묘사를 넘어서, 그림 속 인물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 “자신이 씨를 뿌리는 그 땅의 흙으로 칠해진 듯 보인다.”라며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순간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리고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이 진정한 예술로 가치 있는 주제다” 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토지 소유자만 가지고 있던 투표권을 모든 남성 시민에게 부여했다. 밀레는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1850년 살롱에 입선하여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많은 파리 시민들은 이 강력하고 그늘진 농부가 몹시 위협적이라 생각했다. 

한 작가는 이 농부가 밀이 아닌 “불화와 혁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같다고 생각했다. 밀레는 자신이 평생 보아왔고 바르비종에서 텃밭 농사를 지으며 보았던 농민들의 일상을 솔직하게 그렸을 뿐이다. 그러나 2월 혁명, 7월 혁명 등 시국과 결합하여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독려하는 그림으로 읽혔다. 

밀레가 프랑스에서 널리 인정받기 훨씬 전인, 1850 년대, 보스턴의 화가와 수집가들은 밀레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찾아갔고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유난히 전세계의 어떤 미술관보다 보스턴 미술관에 밀레의 작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선견지명이 있는 수집가들, 특히 박물관 초대 회장인 마틴 브리머, 보스턴 출신 화가인 윌리엄 모리스 헌트, 그리고 수집가 퀸시 아담스 쇼의 관대함 덕분이었다. 퀸시 아담스는 부인과 아들을 통해 이 작품을 비롯한 밀레의 여러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밀레는 농부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노동의 숭고함을 조용히 노래한다. 세밀한 묘사 대신, 밀레는 인물을 덩어리로 표현하며 그 존재감을 극대화했다. 배경은 흐릿하고, 움직임은 정지되어 있다.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한 순간에서,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목격한다.

밀레는 단순한 풍경을 넘어, 인간 삶의 본질을 그려냈다.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농부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아래에서 농부를 올려다보는 구도는 농부에게 숭고한 위엄을 선사한다. 그러나 밀레는 아틀리에에서 상상으로 그림을 그렸기에 얼굴을 정확히 묘사하지 않았고, 그렇게 태어난 인물들은 위대한 침묵 속에서 관객을 응시한다.

“모든 인간은 몸을 움직여 수고하도록 태어났다.”밀레가 남긴 이 말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한 깊은 이해다. 아담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그는 붓으로 노동을 찬미했고, 그것은 변치 않을 인간의 숙명이 되었다. 그의 그림을 바라보면, 우리는 묵묵히 흙을 일구는 한 인간의 땀방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항상 일을 하며 움직이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씨뿌리는 사람, 1888. 11, 반 고흐 미술관

태양이 점차 빛을 잃어가듯, 검은 실루엣으로 묘사된 <씨뿌리는 사람>처럼 내면도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절망으로 휩싸인 그는 전에 <씨뿌리는 사람>을 묘사했던 강렬한 색채는 차분해졌고, 붓터치의 격렬함 마저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고갱과의 공동작업

빈센트는 고갱과 교류하며 예술적 방향을 찾고 싶었고,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 속에서 안정과 영감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격렬했고, 위태로웠으며, 결국 빈센트의 정신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색을 탐구하던 그의 손은 이제 물감을 짜서 입에 넣었고, 물감을 희석시키기 위한 기름을 마셨으며, 붓을 들던 손은 환상 속에서 길을 잃었다. 

빈센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예술이 그에게 주었던 위로와 동시에,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상처였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요양원에서 밀레의 판화를 손에 쥐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그려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모습에서 신념을 발견했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붓을 드는 순간만큼은, 그의 혼란스러운 세계도 잠시 멈추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씨 뿌리는 사람, 1990, 19x26.1cm, 석판화, 목판 그리고 스크린 프린트

미국의 팝아티스트인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의 1980년대 <풍경> 연작은 그의 예술적 탐구가 한층 더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1960년대의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제임스 로젠퀴스트 등과 새로운 미술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이 즐겨보던 만화에서 영감을 받아 잡지나 광고 등 대중문화의 패러디를 도입했다. 그는 초기의 팝아트 스타일에서 벗어나, 추상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전통적인 풍경화와 현대적 시각을 조화시키려 했다. 

리히텐슈타인의 풍경 연구는 1960년대 만화적 요소를 차용하는 방식에서 시작되었지만, 1967년 <10개의 풍경화>에 이르러서는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인 구성으로 풍경화의 기존 개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1986년 발표된 <풍경 스케치>에서는 추상표현주의적 붓질을 연구하며, 붓의 움직임 자체를 하나의 주제로 삼았다. 이는 곧 팝아트가 단순한 대중문화의 재현을 넘어, 미술사와의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은 팝아트가 “미국 미술이 아니라 산업 미술”이라 주장했다.

특히, 리히텐슈타인은 반 고흐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직접 재현하는 대신, 사진이나 인쇄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하며 현대 사회의 이미지 소비 구조를 탐구했다. 

2024년“아메리칸 팝아트 거장전”에서 <씨 뿌리는 사람>을 마주한 순간, 그의 실험적 탐구가 단순한 스타일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흐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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