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불화가 청소년 길거리로 내몬다

가정불화가 청소년 길거리로 내몬다

기사승인 2009-07-20 17:48:00

[쿠키 사회] 지방의 한 예술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김모(18)양은 지난해 4월 집을 나왔다. 학교에선 담임교사와 교장이 말렸지만 뿌리치고 자퇴했다. 옷가방만 들쳐 메고 상경해서 마포 서대문 강남에 있는 고시원을 전전했다. 미성년자였지만 매일 새벽 3∼4시까지 인근 레스토랑과 선술집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벌어먹는 처지는 힘들고 서러웠다. 굶주리지 않고 모기에 뜯기거나 추위에 떨지 않으려면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독하게 버텼다.

“엄마랑 사는 게 싫어서 나왔어요. 집에 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싸우게 되더라고요. 속으론 이러면 안되겠다 싶으면서도 번번이 싸웠어요. 결국 엄마한테 ‘손 안 벌릴 테니 집에서 나가겠다’고 소리치고 나왔어요.” 아버지가 없는 건 상관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것도 아니다. 그저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싫어서 집을 나왔다. 엄마는 김양이 어렸을 때 아빠와 이혼했다.

통장이 바닥나 마지못해 집에 전화한 적이 있다. 어김없이 격한 말다툼으로 번졌다. 마음엔 또 흠집만 남았다. 이제 김양은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그는 “유치하지만 엄마나 저나 ‘먼저 연락하면 진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며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연락하면 또 싸우니까 결국 안하게 된다”고 했다.

집을 나오려는 친구들에게 해줄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양은 잠시 주저했다. “집 나오면 정말 힘들지만 ‘된다, 안된다’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 같아요. 어떤 집에선 저보다 더 심하게 갈등하는 상황도 있을 텐데. 정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집이 집이 아닌 애들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가정불화가 청소년을 가출로 내몬다

상담 전문가들에 따르면 김양처럼 가정에서 부모·자식 간 갈등을 참지 못하거나 부모 간 다툼을 보다못한 청소년들이 집을 버리고 뛰쳐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각종 편의시설과 친구들이 청소년을 거리로 끌어당기는 상황에서 가정 불화는 청소년을 집밖으로 밀어낸다.

지난해 9월 집을 나왔다는 최모(17)군은 “허구한 날 싸우는 엄마 아빠가 너무 보기 싫어서 나왔다”고 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상대를 지독하게 비난하는 부모의 모습에 구역질을 느꼈다고 한다.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이불을 덮어도 짜증스러운 고성은 밤마다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혼’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어머니는 이따금 어린 최군에게 “너 때문에 니 아빠랑 사는 거야”라고 짜증을 부렸다. 최군은 “그런 부모라면 없느니만 못해요. 전 어릴 때 엄마나 아빠가 늦으면 ‘드디어 이혼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집에 있는 게 더 불안해요”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모(16)양은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2만원을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지난 5월 가출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와 싸우던 아빠를 말리다 처음 맞은 이양은 그때까지 4년이 넘도록 폭력에 시달렸다고 했다.

“한참 싸대기를 올리다가 엎어지면 밟아요. ‘엎드려 뻗쳐’를 시키다가 땀이 뚝뚝 떨어지면 운다고 발로 걷어찼어요. 아빠가 우는 걸 싫어하지만 그렇게 하면 억울해서 안 울 사람이 어딨어요.”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좋은 엄마·아빠 되기 교육’을 받을 테니 돌아오라고 했지만, 이양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몸서리치고 있었다.

한 전문상담교사는 “가출이나 폭력, 교우 관계 등 각종 문제로 상담하더라도 내막을 알고 보면 십중팔구는 가정 불화를 안고 있다”면서 “가정에서 자녀가 얼마나 존중 받고 부모와 대화하느냐, 부모간 관계가 좋으냐 등은 청소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전했다.

사랑이 말라붙은 집은 버려진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지난해 전국 일반 청소년 1만4716명의 유해환경 접촉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8.2%가 학업 성적이나 진로·진학 등 다양한 사안을 놓고 부모와 갈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 그러한 갈등은 가장 높은 가출 원인으로 꼽혔다.

가족 간 갈등은 소득 수준이나 사회적 계층보다 의사소통이 메마른 탓에 벌어진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중산층이 많은 서울 강남 지역에선 특히 부모의 강압적인 양육으로 탈선하거나 가출하는 경우가 잦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가 대학교수인 김모(17)군은 성적을 올리라는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 중간고사를 앞두고 집을 뛰쳐나왔다가 사흘 만에 붙잡혀 들어갔다.

서울 강남교육청 김희대 전문상담교사는 “중산층 가정의 경우 아버지는 직장 생활에 치여 관심을 쏟지 못하고, 어머니는 자녀의 감정이나 입장을 도외시한 채 성적만 강조하다 보니 서로 갈등하게 된다”며 “한번 가출한 아이를 계속 강압적으로 대하면 재가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가출은 그 자체가 큰 비행은 아니지만 절도나 각종 폭력 피해의 위험에 노출되는 동시에 2차, 3차 범죄로 가는 첫 단추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적어도 8만6085명의 아동과 청소년이 집을 나가거나 실종됐다. 가출 신고는 2004년 1만6894건에서 지난해 2만3097건으로 36.7% 늘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강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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