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 김윤아 '봄이 오면', 음유시인의 노래

[한채윤의 뮤직에세이] 김윤아 '봄이 오면', 음유시인의 노래

기사승인 2013-05-14 14:49:01

[한채윤의 뮤직에세이(2)] 김윤아 ‘봄이 오면', 음유시인의 노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손을 꼭 잡고 마주 보며 걷는 커플들이 있고 데이트 중인 것 같은데 아직 손을 잡을 만큼 친하지 않은 커플도 보인다. 같은 듯 다르게 센스 넘치는 커플룩을 뽐내는 연인도 있고 한껏 멋을 낸 여자 둘도 보인다. 운동복 차림의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지나가면, 오래전 이 거리를 걷던 너와 내가 있다.

걷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추운 날이 싫다. 이번 봄은 유난히 더디게 찾아왔다. 분명 햇살은 봄인데 시린 날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절기상으로 여름(입하. 5월 5, 6일 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침저녁으로 걷기에 좋은 날씨가 되었다.

걷는 걸 좋아하게 된 건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살을 빼기 위해 다년간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종국에 깨달은 사실은 조금 시시하게도 ‘적게 먹고 많이 걷기’. 시중에 나와 있는 살이 빠진다는 무언가는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한 번씩 다 경험해 본 것 같다. 새로운 걸 시도 할 때 마다 살이 빠지기 전에 몸이 나빠지는 걸 먼저 느꼈고 결국 지금의 몸을 만든 건 ‘먹은 것 이상으로 걷자!’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보통은 혼자 걷는다.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건 흔한 일이지만 함께 걷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다. 가끔은 카페에 앉아 이야기 하는 대신 좀 걷고 싶다고 생각한다. 대개는 말도 못 꺼내고 말지만.

봄이 오면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

(김윤아 ‘봄이 오면’)

“햇살 좋은 날 골라 그냥그냥 오세요. 산책이나 하지요.”

누가 먼저 약속을 했는지, 왜 만나기로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햇살 좋은 봄날의 산책’만 있었다. 마냥 신이 났다. 평일 낮 시간이라 교외로 나가는 길은 차도 많지 않았다. 운전 하는 내내 눈이 부셨지만 선글라스는 쓰지 않았다. 눈으로 햇살을 맞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떤 만남이 될지 모른 채 소풍 같은 장면들만 떠올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밥 먹어요” “차 한 잔해요”가 아닌 “산책이나 하지요” 라니…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한눈에도 멋진 건물과 책이 있는 동네였다. 어디든 서점이고 도서관이었다. 멀지 않은 곳인데 아주 멀리 나온 기분이었다. 구경도 하고 점심식사도 할 겸 그냥그냥 걷기 시작했다. 아니, 걷기위해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는 게 더 옳겠다. 단지를 벗어나니 자그마한 산에 들꽃이 피어있는 여느 시골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어쩌면 하지 않는대도 좋을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흘러나왔다. 앉아서 대화를 하면 진심은 머리에 머문다. 걸으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낯선 장소에서 아직은 낯선 사람과 함께 걷자니 짧은 여행을 온 기분마저 들었다. 간간히 대화가 끊어졌지만 곧 할 말을 찾아냈고 왜 만나기로 했었는지 기억해 내는 것이 무색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멋진 곳에 초대해 주셨으니 저는 노래를 불러드릴게요.”

곡을 쓰면 누구에게든 들려주지 못해 근질거린다. 꽃에 관한 노래를 새로 썼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어디든 가지고 다니며 노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얼마 전 작은 기타도 장만한 터였다. 봄날이었고 그에 어울리는 햇살과 꽃이 있었고 노래를 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트루바두르의 노래

11세기 중세시대의 남프랑스,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시절, 트루바두르(Trubadour)라 불리던 기사 계급의 사람들은 칼 대신 악기를 들고 성을 찾아다니며 자기가 지은 시를 노래하는 첫 번째 음유시인이었다.

이들은 사랑(칸소 Canso), 세상에 대한 풍자(에누에그 Enueg), 연인들의 이별(알바 Alba), 전쟁이나 서사(레 Lai)를 노래했는데 안타까운 사랑에 관한 시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시인이 사모하는 여성은 고귀한 신분이거나 이미 결혼한 여성이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는데, 성을 옮겨 다니며 귀족들 앞에서 노래 부르던 그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종달새의 날개 짓을 보노라니 그 날개는 햇살을 향해 퍼덕인다

그리고는 기절하듯 떨어지는데 아마도 그의 가슴에 일어난 기쁨 때문일 것이다

아! 샘이 나네,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모든 이들이

허나 놀라운 건 마음이 욕망으로 즉시 녹아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베르나르 드 방타도른·1127∼1195· ‘내가 종달새의 날개 짓을 보노라니’)

내가 부른 건 삶과 위로에 관한 노래였지만 아마도 약간의 애정은 느껴졌을 거라 생각한다. 애정이 없었다면 애초에 함께 걷는 일도 없었겠지. 억지를 부려도 맺어지지 않는 관계가 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엮이는 관계가 있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는 종종 억지를 부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시간과 노력을 자연스러운 관계에 쏟는 편이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전부 멋진 그 곳의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1970년대 독일에서 지어졌을 법한 하얀 건물에서 책을 읽고 싶다. 그러려면 또 가야지. 언제든 놀러오라 했으니 우린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수 있겠다.

봄날은 간다

이 거리를 함께 걸었던 그를 떠올린다. 두 번의 봄을 여기서 그와 맞았더랬다. 헤어진 후 네 번째 다시 돌아 온 봄. 한 때는 그가 옆에 없으면 죽지 않을까 했는데 이제는 잘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김윤아 ‘봄날은 간다')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앨범 '한채윤 첫번째_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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