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여객선 침몰-서거차도 르포] “오매 이게 뭔일이다냐? 생떼같은 자식들이…""

"[진도 여객선 침몰-서거차도 르포] “오매 이게 뭔일이다냐? 생떼같은 자식들이…""

기사승인 2014-04-17 20:13:00
[쿠키 사회] “오매 이게 웬 날벼락이라냐? 생떼 같은 자식들 아까워 죽겄네. 얼른 나가서 귀한 아들딸들 구해요, 구해!”

전남 진도군 서거차도 주민 백옥진(52·여)씨가 다급하게 외쳤다. 16일 오전 9시30분 진도파출소 서거차출장소에 여객선 세월호 침몰 상황이 전파된 직후였다. 백씨는 마을 남자들을 이끌고 구조에 나설 선박을 준비하던 남편 이진석(54) 어촌계장을 이렇게 다그쳤다. 주민들은 송정호 아리랑호 유진호 우진호 등 어선 네 척을 몰고 침몰 현장으로 달려갔다.

침몰 소식이 알려진 지 30분 만인 9시59분 서거차도에 헬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첫 번째 구조자가 사고 해역에서 제일 가까운 이 섬에 도착했다. 생존자 4명을 내려놓은 헬기는 1~7분 간격으로 다섯 차례 더 27명을 구조해왔다. 헬기로 도착한 이들은 옷차림도 멀쩡하고 비교적 상태가 괜찮았다.

그러나 오전 10시36분 민간구조선 진도아리랑호에서 내린 생존자들은 전혀 달랐다. 58명의 학생과 어른들이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덜덜 떨며 내렸다. 대부분 신발을 잃어버려 맨발이었고 상의가 벗겨져 맨몸인 사람도 있었다.

“아직 배에 남은 사람이 많아요.” “제 뒤에도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다 구조된 건가요? 빨리 배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학생들은 너나없이 눈물을 쏟았다. 일부는 친구들이 올 때까지 마을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섬 주민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오랜 어촌 생활에 대부분 바다에서 가족이나 친지를 잃어본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주민 소형규(58)씨는 기름이 떨어진 마을 복지회관 보일러에 자기 집에서 가져온 기름을 채웠다. 조도면 출장소에서 일하는 홍희정(38·여)씨는 구조된 여학생 31명을 모두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홍씨는 집에 데려간 학생들에게 전화기를 내주며 “부모님께 연락부터 하라”고 했다. 전화기를 붙들고 생존 소식을 알리는 여학생들로 홍씨 집은 눈물바다가 됐다.

홍씨가 보일러 온수를 틀고 여학생들을 씻길 때 어촌계장 이씨가 새 속옷과 양말 10켤레를 가져왔다. 아내가 쓰도록 미리 사둔 거였다. 홍씨는 가스렌지에 물을 올리며 “배고플 텐데 라면 끓여 먹으라”고 한 뒤 다른 생존자를 돕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섰다.

단원고 남학생 12명은 주민 최환규(68)씨 집으로 갔다. 최씨는 학생들을 위해 자신과 아내가 입던 옷가지들을 모두 꺼내줬다. 집에 준비된 음식이 별로 없어 일단 컵라면부터 건넸다. 허학무(61) 이장은 슈퍼마켓에서 라면 한 박스와 컵라면 두 박스를 사들고 어른 생존자들이 머물고 있는 복지회관을 찾았다. 민옥연(70·여) 노인회 총무는 지난 가을 담갔던 김장김치 10포기를 들고 왔다. 윗마을에 사는 정도엽(73) 할머니는 자기가 신으려고 마련해둔 양말 6켤레를 유모차에 싣고 왔다.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서거차중앙교회 박준하(43) 목사가 교회에 있는 슬리퍼 30여개를 모두 모아 가져왔다. 모포 15개도 함께였다. 박종예(41) 사모는 신발이 없던 한 여학생을 위해 자신이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줬다.

낮 12시35분 구조된 89명 전원이 농협 소속 저도고속페리를 타고 서거차도를 떠났다. 사고 후유증이 남은 일부 학생들은 해양경찰관들에게 “배를 못 타겠다”고 호소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서거차도 주민 8명은 17일에도 새벽 5시부터 어선 네 척을 끌고 사고 해역으로 나갔다. 주민들은 추가로 발견될지 모를 생존자를 위해 마을 복지회관에 임시 대피소를 설치키로 했다. 서거차도=박요진 기자

서거차도=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요진 기자 true@kmib.co.kr
박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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