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안동=김희정 기자]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도자기를 만난 후 더 큰 세상을 가졌다. 그에게 도자기는 뫼비우스 띠처럼 갇혀진 미로의 꿈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길이다.
신라의 토기부터 조선의 분청사기까지 수많은 봉우리를 넘어 선조들의 예술혼에 사로잡혔다. 감동과 흠모의 마음을 긴 호흡으로 가다듬고 그는 오늘도 물레 앞에 앉는다.
◆ 전통에 대한 흠모, 작품으로 꽃피우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를 빠져나와 흙예술원으로 가는 길은 줄곧 낙동강을 끼고 달린다. 넉넉한 강풍경이 마음 속 먼지들을 씻어낼 무렵 월영교가 나타나고 얼마안 가 안동공예문화전시관이 보인다. 그곳 1층에 강을 마주한 흙예술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희복 도예가의 작업공간이자 작품전시실이다.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공간에 햇살이 은은하게 비쳐든다. 그의 작품들은 전통의 우아함 속에 현대적 감성이 잘 녹아들어 있다. 현대적 감각은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옛 도자기에 선조들의 그림을 보면 늘 감탄을 합니다. 흉내 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범접할 수 없어요. 피카소가 애기그림처럼 그리는 것은 어느 선을 넘어서 경지에 이르러야 되는 거잖아요. 우리 선조들 그림이 그래요. 욕심 없는 무심의 선! 아,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청주가 고향인 그가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이다. 상지대학 공예디자인과 도자기 담당 교수로 오면서 부터다. 안동은 전통을 바탕에 둔 땅이다. 서원과 사찰은 물론 한옥에 이르기까지 목재 문화재의 보고이며, 탑이나 불상 등 고미술이 산재해 있다.
전통의 미(美)에 매료된 그에게 안동은 그야말로 복된 땅이다. 이러한 전통의 감흥은 그의 작품에 끊임없는 미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그의 작품이 현대적이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이유도 전통의 숨결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프링커팅 시리즈’를 자세히 보면 오래된 목재 결을 닮았다. 흙을 스프링으로 커팅해서 이어붙인 도자기는 오래될수록 두드러지는 나뭇결 모양 그대로다.
한옥의 나무기둥이나 오랜 대문 앞에 서있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무기둥을 지나온 수 백 년의 바람과 대문을 드나든 세월을 영원한 도자기에 아로새겼다.
◆ 영원한 도자기의 매력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명 Road 시리즈’는 길고 긴 줄 하나로 이어 만든 도자기로 뫼비우스 띠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지만 뫼비우스 띠가 미로의 반복이라면 그는 영원을 표현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띠는 새로운 길, 끝없는 길 그리고 불멸의 생명을 담았다.
그에게 도자기는 영원이다.
그의 어릴 때 꿈은 화가였다. 코 흘리던 시절부터 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도자기의 길로 들어서게 됐고, 그림에 대한 미련이 늘 남아있었다. 그러나 도자기는 그를 매료시켰고, 점점 도자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도자기는 그림보다 훨씬 큰 세계였다. 조형과 공학은 물론 그가 그토록 원하던 그림까지 포함된 예술이다.
“도자기는 무한합니다. 고려청자가 수 천 년을 바다 속에 잠들어 있어도 변함없었잖아요. 도자기의 매력은 영원하다는 거예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며 그는 어린 시절 꿈을 이룬 것이다. 더구나 불멸의 도자기에 그린 그림은 그의 꿈처럼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화가가 되지 못한 여한은 이제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훌륭한 예술의 맥을 이어간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합니다.”
◆ 흙은 그의 삶이며 신앙
흙예술원의 문을 연 것은 2003년이다. 10여 년 동안 상지대 공예디자인과 교수를 하다 퇴직한 해였다. 후배 양성에 쏟던 열정을 오롯이 작품 활동에 쏟아 붓고 있다.
도자기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인정받아 2013년 경상북도 최고장인에 선정됐다. 조형예술부분 ‘경상도 문화상’도 수상했다. 경상북도 미술대전, 산업디자인전, 공예품대전 심사위원과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지역 향토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안동과 서울, 스위스, 프랑스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회를 열며 작품을 인정받았다. 영국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 한국현대도예초대전에 초빙되기도 했다. 도자기와 함께 해온 지 어느덧 40여년. 되돌아보면 흙은 그의 삶이며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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