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열다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열다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6-11 12:00:00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은 열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가 어린 시절 함께 지내면서 영향을 받은 음악가 바그너를 기리고, 자신이 퇴위한 뒤에 거처할 목적으로 건설했다. 1868년 루트비히 2세 본인의 재산과 막대한 차용금을 바탕으로 중세부터 내려오던 힌터호엔슈반가우(Hinterhohenschwangau) 성터에 로마네스크양식의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설계는 무대 디자이너 크리스티안 양크(Christian Jank)가 맡았고 건축은 에두아드 리델(Eduard Riedel)이 맡았다. 

뉘른베르크 성(Schloss Nuremberg)을 참고해 직사각형과 반원형 궁륭과 같은 단순한 기하학적 특징을 가진 로마네스크양식, 위쪽을 향한 선과 날씬한 탑 그리고 섬세한 장식이 특징인 고딕양식, 왕궁 정전(正殿)의 장식이 두드러지는 비잔틴 건축과 예술 등을 절충한 신고딕양식으로 계획했지만 결국 로마네스크양식이 기본이 됐다.

루트비히 2세가 1868년 5월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푈랏(Pöllat) 골짜기에 있는 호엔슈반가우의 옛 성을 독일 기사의 성의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재건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에서 살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 그곳은 세상에 구원과 참된 축복을 가져온 신성한 친구를 위한 거룩하고도 비길 데 없는 가장 아름다고 훌륭한 궁전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뒤에서 성을 볼 수 있는 가수의 방에서는 탄호이저(Tannhäuser)를, 성 안뜰과 열린 복도 그리고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서는 로엔그린(Lohengrin)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호엔슈반가우 성을 재건하겠다는 루트비히 2세의 구상은 당시 성낭만주의(Burgenromantik)로 알려진 새로운 건축양식과 바그너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은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벽돌을 쌓고 다양한 형태의 돌을 덧댔다. 성의 전면에는 인근의 채석장에서 나온 석회암을 사용했고, 정문과 밖으로 돌출한 창문에는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슈라이트도르프(Schlaitdorf)에서 가져온 사암을 썼다. 그 밖의 창문, 아치의 틀, 기둥 그리고 기둥머리 등에 사용된 대리석은 잘츠부르크 인근의 운터스베르그(Untersberg)에서 온 것이다. 1880년에 정산한 바로는 잘츠부르크 대리석 465톤, 사암 1550톤, 벽돌 40만장 등이 소요됐으며, 비계를 세우는데 들어간 목재만도 2050㎥였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그 규모와는 달리 왕실에서 사용하기에 충분한 공간은 없었다. 다만 왕이 은밀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 하인들을 위한 방이 있었을 뿐이다. 건물은 주거용이 아니라 장식용으로, 1883년에 사망한 바그너의 삶과 업적에 바쳐진 우정의 사원이었던 것이다. 바그너 생전에 이 건물에서 기거할 수는 없었지만, 1884년 루트비히 2세는 미완공 상태인 건물에 입주할 수 있었다. 루트비히 2세는 생전에 모두 172일을 이곳에서 지냈으며, 밤을 보낸 날은 11일에 불과했다.

노이슈반슈타인을 건설하는데 620만 마르크가 들었는데, 이는 2009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4000만 유로(한화로 약 537억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의 광대한 건설사업은 중세풍 기사의 성을 상징하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머물지 않았다. 린더호프(Linderhof) 궁전의 로코코 양식 별궁과 헤렌킴제(Herrenchiemsee)에 있는 절대주의 왕정시대의 기념비라 할 바로크양식 궁전의 건설이 이어졌다.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기 위해 루트비히 2세의 빚은 늘어만 갔고, 1400만 마르크에 달했음에도 건축을 지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1886년 바바리아 정부는 루트비히 2세의 퇴위를 결정했다. 루트비히 2세는 6월 11일 정부가 보낸 베르나르드 폰 구든(Bernhard von Gudden)에 의해 성을 떠나야 했고, 13일 베르크(Berg) 성 인근에 있는 스타른베르크(Starnberg) 호수의 얕은 물가에서 두 사람 모두 죽은 채 발견됐다. 공식적으로는 자살이라고 발표됐지만 의문이 많은 죽음이라고들 한다.

루트비히 2세가 죽었을 때 노이슈반슈타인의 상당부분은 미완성인 채였다. 궁성건물은 기초만 다진 상태였고, 성문과 내실을 연결하는 통로나 테라스와 분수가 있는 정원은 착공도 해보지 못했다. 결국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그럭저럭한 상태로 1892년에 공사가 마무리되고 말았다. 

1923년 비텔스바하(Wittelsbach) 가문이 제기한 소송결과 호엔슈반가우 성은 비텔스바하 가문의 재단 소유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바이에른주에 귀속됐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까닭에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프랑스에서 가져온 약탈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종전 무렵 나치친위대는 궁전을 폭파해 약탈품을 없애려 했지만 임무를 부여받은 조직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성은 바이에른의 훌륭한 관광 자원이 돼있다. 디즈니랜드사의 만화영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성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본뜬 것이며, 그 밖에도 많은 영화와 게임 등에서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은 절벽의 꼭대기 150m 길이의 대지 위에 세운 개별 구조물들로 이뤄졌다. 수많은 탑과 장식용 포탑, 게이블, 발코니, 작은 뾰족탑과 조각들이 배치됐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은 쌍방향 및 삼각형으로 제작됐다. 남쪽으로 펼쳐지는 테겔베르크(Tegelberg)와 푈랏(Pöllat) 협곡을, 그리고 북쪽으로는 호수들이 있는 알프스 산자락을 각각 배경으로 하는 건물의 조화는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그림 같이 아름답다. 

수세기 동안에 걸친 건축을 통해 만들어져온 다른 성들과는 달리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계획에 따라 단계적으로 비대칭의 건물을 세워나감으로써 마치 오래된 성처럼 보이도록 했는데, 정작 중세 성의 중요한 요소인 요새로서의 기능은 배제됐다. 절벽이라는 천연의 요소 말고는 당시 사용되던 대포를 막아낼 수 있는 건축학적 요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2개의 계단 탑이 나란히 있는 대칭적인 문간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바바리아왕실의 문장이 붙어있는 성문을 통과하면 안뜰에 들어서게 되는데, 안뜰은 복층으로 돼있다. 성문 동쪽으로 난 아래쪽 안뜰의 왼쪽으로는 직사각형 탑과 갤러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안뜰은 오른쪽은 열려있어 주변 경치를 조망할 수 있다. 위쪽 안뜰에는 45m에 달하는 사각형 탑이 두드러진 건물이다. 이 건물 역시 안뜰의 다른 건물과 조화를 이룰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다. 

전망대에서 보면 북쪽으로 알프스 산자락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안뜰 정면으로는 궁성이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기사단 건물, 왼쪽으로는 내실이 있다. 기사단 건물은 성문과 아케이드가 닫혀있는 갤러리를 통해 연결된다. 기사단 건물과 내실은 로엔그린의 첫 번째 행적에 등장하는 앤트워프(Antwerp) 성의 주제를 구성하지만, 결코 사용된 적은 없다. 위쪽 안뜰에는 예배당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궁성은 2개의 5층 건물로 구성되는데 수많은 장식용 굴뚝과 장식용 포탑이 세워져 있고, 안뜰 방향의 벽에는 두 점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왼쪽의 그림은 조지 성인이다. 계획대로라면 200여개의 방을 두었을 것이나, 지금은 15개의 객실과 홀이 있다. 가장 큰 방은 동쪽 건물의 4층에 있는 가수의 방이다. 27×10m 크기의 이 방은 로엔그린과 파르지팔을 주제로 장식됐고, 이 방에서 열린 최초의 공연은 바그너 사후 50주년 기념 콘서트였다.

서쪽 건물에 있는 알현실은 20×12m 크기인데, 3층과 4층을 터서 높이가 13m에 달한다. 후진에 루트비히의 왕좌를 두었고, 3면은 화려한 아케이드를 조성해 빌헬름 하우쉴드(Wilhelm Hauschild)가 그린 예수와 12사도의 그림으로 채웠다. 알현실 바닥의 모자이크는 루트비히 2세가 죽은 뒤에 완성된 것이다. 샹들리에는 비잔틴 왕관을 본떠서 만들었다. 

알현실은 파르지팔에 나오는 성배의 방을 연상케 하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왕의 신성한 권리를 상징한다. 후진에는 6명의 시성된 왕의 초상화를 걸었는데, 프랑스의 루이 9세(Louis IX), 헝가리의 이스트반 1세(István I), 영국의 참회왕 에드워드(Emward),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1세(Václav I),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Olaf II)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2세(Heinrich II)다. 

동쪽 건물에 있는 거실은 로엥그린의 전설을 주제로 꾸며졌는데, 소파와 테이블, 안락의자 등의 가구는 현대적이고 편안한 것들이다. 거실에서는 작은 동굴로 연결되는데, 인공폭포와 무지개를 만드는 장치가 있는 이곳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회르셀베르크(Hörselberg) 동굴을 묘사한 것이다. 

식당은 동쪽 건물의 4층에 있는데, 3층에 있는 주방하고 연결할 수가 없어서 린더호프 궁전이나 헤렌킴제의 궁전에서처럼 주방에서 식탁에 상을 차려 식당으로 바로 올려 보낼 수가 없었다. 침실은 식당 옆에 있는데, 딸려있는 예배당과 함께 궁전에서 유일하게 신고딕 양식으로 장식된 방이다. 왕의 침실에는 조각으로 장식된 커다란 침대가 있으며 14명의 조각가가 4년 이상 매달려 제작한 것이다.

루트비히 2세 역시 성이 관광지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서 자신이 죽으면 성을 부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19세기 말의 성과 성주들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고성이 매물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한 성에서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성을 사들여 별장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성에서의 생활은 불편하기가 그지없다고 하는데, 옛날에 지은 건물이 단열처리나 난방시설이 제대로 돼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집들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개축은 물론 보수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유럽의 고성 역시 정부나 지방정부의 관리를 받고 있어 보수마저도 여의치 않아 현대식 냉난방시설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옛날 방식으로 건물 전체에 난방을 하려면 비용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 좁은 공간만 사용할 수밖에 없어 불편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실제로 중세 사람들 역시 양들과 함께 살기도 했을 뿐더러, 성주 역시 부엌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는 마차가 다니는 길을 따라 걸어서 내려왔다. 숲 향에 섞여드는 말의 배설물 냄새까지도 건강하게 느껴진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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