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9-02 05:00:00

1시경 점심을 먹고 포츠담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티어가르텐 서쪽 끝 동물원 남쪽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 복음교회(Die evangelische 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를 구경했다. 주로 기념교회(Gedächtniskirche)라고 하는 이 교회를 베를린 사람들은 간단하게 KWG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생긴 모양을 빗대어 썩은 이빨(Holer Zahn)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폭격으로 종탑만 남고 무너진 원래의 기념교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황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Augusta Victoria)가 주도한 개신교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지었다. 독일 전통의 종교적 가치를 회복함으로써 당시 부상하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응하려 한 것이다. 1891년 착공한 교회는 1895년 완공됐다. 

빌헬름 2세는 독일통일의 위업을 이룬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기려 카이저 빌헬름 기념 복음교회라는 이름을 헌정했다. 바우아카데미 소속의 프란츠 슈베헤텐(Franz Schwechten)의 설계가 설계공모에서 우승했다. 라인란트 출신의 슈베헤텐은 신 로마네스크 양식을 적용해 2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응회암으로 된 본당과 113m높이의 종탑을 짓고 2740㎡ 넓이의 벽모자이크를 넣기로 했다. 

1943년 11월 23일의 공습으로 기념교회는 종탑과 몇 개의 현관만 남고 보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됐다. 1947년 교회 재단은 교회를 다시 짓기로 결정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1956년의 공모전에서 에곤 아이어만(Egon Eiermann)의 설계가 채택됐다. 아이어만의 설계에서는 남아있는 종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 높이 113m에서 71m만 남은 종탑이 ‘베를린의 심장’이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컸다. 특히 제국주의를 추종하여 무모한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이 전쟁의 고통을 겪게 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설계를 수정해 종탑은 남기기로 했다. 새 교회는 1959년 기초를 놓고 1961년 말에 봉헌됐다.

길이 100m에 폭이 40m의 대지 위에 지름 35m, 높이 20.5m로 1000명이 들어가는 8각형의 새 교회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인데, 교회의 벽은 2만129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상감, 세공해 마치 벌집모양을 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 예술가 가브리엘 루아르(Gabriel Loire)가 샤르트르 대성당의 유리색에서 영감을 얻어 파란색을 주조로 하고 루비 레드, 에메랄드그린과 옐로우를 조금 섞어 넣었다. 새 교회의 모습은 옛 교회의 종탑과 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까닭에 베를린 사람들은 ‘파우더와 립스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입구를 들어가면 정면에 제단이 있고 그 위에 십자가가 걸려있다. 조각가 카를 헴메터(Karl Hemmeter)가 황동으로 제작한 십자가는 4.6m 크기에 무게가 300kg에 달한다. 제단 맞은편에는 카를 슈케(Karl Schuke)가 제작한 5000개의 파이프로 된 오르간이 있다. 교회의 북동쪽에는 3개의 예술작품이 있다. 

첫 번째는 1933년부터 1945년 나치 치하에서 희생된 개신교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청동명판이다. 히틀러 암살시도 20주년인 1964년에 헌정된 명판에는 13세기 스페인의 나무십자가가 더해져 있다. 그 옆으로 ‘스탈린그라드 성모’가 있다. 희망과 화해를 상징하는 이 그림은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 갇혀있던 크루트 로이버(Kurt Reuber)가 목탄으로 그린 것으로 사본을 코벤트리 대성당과 볼고그라드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에 보내졌다. 3번째 작품은 볼고그라드의 성모 마리아 아이콘이다.

새 교회의 탑은 직경 12m 높이 53.5m로, 평평한 지붕 위에 황금빛 십자가를 세웠다. 십자가 위에 역시 황금빛 공을 올렸다. 종탑에는 1870~1871년 보불전쟁의 전리품인 프랑스 대포로 주조한 6개의 청동종을 매달았다. 남겨진 옛 종탑은 복원을 거쳐 1987년 다시 일반에 공개됐다. 바닥에는 용과 싸우는 미카엘 대천사의 모자이크가 있다. 

둥근 천정에는 초창기와 최근의 호헨졸레른 왕자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그밖에 중세 독일의 중요한 군주, 개혁사상가, 개혁 왕자 들을 그린 모자이크가 있다. 얕게 새긴 부조에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빌헬름 1세의 생애, 전쟁과 평화를 나타내는 상징적 인물들을 볼 수 있다. 북쪽 애프스에는 옛 교회와 파괴에 관한 내용을 담은 16개의 패널이 전시돼있다. 

2시 무렵 베를린을 출발한 버스는 1번 국도인 쾨니히스트라세(Königstraße), 우리말로 옮기면 ‘왕의 도로’를 달려 포츠담으로 향했다. 숲속에 난 도로를 달리는 느낌이 참 좋았다. 하지만, 밤에는 가로등이 없는 국도가 아주 컴컴해서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데다 심지어는 멧돼지가 출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밤에 이런 길을 운전하려면 바짝 긴장해야겠다.

예전에 지방에서 근무할 적에 한밤중에 운전을 해서 내려가려면 휘영청 뜬 달빛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가슴이 콩닥거리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 방영된 ‘호텔 델루나’에 등장할만한 장면이다. 이따금 있는 법의 부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역시 부검을 자주하는 후배로부터 조언을 듣고는 그런 느낌은 사라지고 말았다. 부검의는 죽은 자의 사인을 밝혀 한을 풀어주는 일을 하는데, 영혼이 있다면 오히려 부검의를 보호해줄 것이란 이야기였다. 

이윽고 숲이 끝날 무렵 근사한 다리가 나오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다리를 구경했다. 글리니케 교(Glienicker Brücke)다. 베를린의 반제(Wannsee)와 브란덴부르크주의 수도 포츠담을 연결하는 다리로 하벨 강의 지류에 걸려있다. 부근에 있는 프로이센의 카를 왕자의 여름 궁전, 글리니케 궁전(Schloss Glienicker)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지금까지의 다리 가운데 4번째인 현재의 다리는 1907년에 건설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파괴돼 재건한 것이다.

1660년경에 나무로 된 다리가 처음 건설됐고, 1777년에는 다시 목재로 난간과 양면에 가드하우스가 있는 다리를 건설했다. 그 뒤로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1834년 카를 프리드리히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설계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도개교를 건설했다. 도개교는 선박의 통행을 통하여 도로상의 교통이 끊어지는 단점이 있어 1907년 철골조로 된 현재의 다리가 건설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입은 손상을 재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리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영토인 포츠담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속하는 서베를린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양 국가의 합의가 쉽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건설된 뒤로는 동맹군과 외국의 외교관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소련과 서방세력이 독일을 분할 통치하던 시절에는 이 다리에서 양진영의 스파이들을 교환했기 때문에 기자들이 ‘스파이 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때로는 ‘한숨의 다리’라고도 불렀다. 글리니케 다리는 존 카레의 소설 ‘스마일리 사람들(Smiley's People)’, 해리 팔머 감독의 1966년작 영화 ‘베를린에서의 장례식(Funeral in Berlin)’에도 등장한다. 또한 1980년대 영국 밴드 더파우(T'Pau)의 첫 번째 앨범에서 타이틀곡 ‘스파이 다리(Bridge of Spies)’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글리니케 다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노이에 가르텐 북쪽으로, 융페른제(Junfernsee) 가까이 세실리엔호프궁전(Schloss Cecilienhof)에 도착한다. 프로이센왕국과 독일제국을 다스린 호헨졸레른 가문이 마지막으로 지은 궁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전후 유럽과 아시아의 향방을 논의한 포츠담회의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역사적인 회담이 러시아 점령지역인 포츠담에서 열린 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 엄청난 인적 피해를 낸 러시아의 스탈린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세실리엔호프 궁전이 있는 노이에르 가르텐은 178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에 따라 안할트-데사우(Anhalt-Dessau)에 있는 뵐리츠 공원(Wölitz Park)을 본 따 만든 것이다. 빌헬름 2세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리석궁전(Marmorpalais)을 짓고, 아들인 빌헬름황태자와 태자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부인 세실리에(Cecilie Auguste Marie)를 위한 궁전을 짓도록 했다. 

1913~1917년 사이에 건축가 파울 슐체-나움부르크(Paul Schultze-Naumburg)의 설계로 영국의 튜더양식으로 지었다. 목재 골조에 벽돌로 지은 궁전은 서로 다르게 장식된 55개의 굴뚝이 여러 개의 안뜰 곳곳에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모두 176개의 객실이 있는데, 공공의 객실들은 1층의 중앙홀 주변에 배치돼있다. 개인 침실과 탈의실 및 욕실도 갖춰져 있다. 큰 홀의 거실에는 단치히(Danzig) 시에서 선물한 참나무로 만든 커다란 계단이 있다. 1층에는 황태자를 위한 흡연실, 도서관, 조찬실이 있는 황태자구역과 음악 살롱 등 황태자비를 위한 구역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베를린회의인 포츠담회의는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열렸다. 영국의 처칠수상이 소련 점령구역에서의 회의를 반대했지만 미국의 해리 트루먼대통령이 동의함에 따라 포츠담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회담을 위해 소련 측에서는 도로와 다리를 보수하고 세실리엔호프 궁전에는 에렌호프(Ehrenhof)에 있던 소련의 붉은 별을 포함한 나무, 관목 등을 옮겨 심었다. 세실리엔호프 궁전의 36개 객실과 중앙 홀을 개조해 회담에 참석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겉에서 보면 아담하지만, 들어가 보면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실내에서 황태자와 태자비가 생활하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우아한 분위기에 천신만고 끝에 히틀러의 무모한 도발을 꺾어낸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의 정상들이 전후처리 방안을 논의하던 모습이 겹치는 것은 전혀 아니지 싶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지만, 그 적이 무너지고 나면 같은 편도 이해에 따라 새로운 적이 된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무수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총서기가, 미국은 해리 S. 트루먼대통령이, 그리고 영국은 처음에는 윈스턴 처칠이 참석했다가 중간에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각각의 나라를 대표해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1045년 5월 8일 무조건 항복하기로 한 독일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비롯해 전후 질서, 평화조약의 체결 그리고 전쟁의 영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등을 논의했다. 중동부 유럽을 점령한 소련군이 폴란드에 꼭두각시 공산정권을 세운 것을 두고 미국과 영국은 공산주의 소련이 공격적인 팽창주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했다. 한편 스탈린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통제는 잠재적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적 수단일 뿐이라고 눙쳤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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