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9-09 03:00:00

5시 무렵 상수시 궁전에 도착했다. 상수시 궁전으로 가는 길에 퇴락한 모습을 한 커다란 풍차를 볼 수 있다. 상수시의 역사적 풍차(Der Müller von Sanssouci)다. 173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허가를 받아 1737년 착공해 1738년 완공됐다. 

그 무렵 포츠담은 왕실 거주지가 돼 수비대가 주둔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기존의 풍차방앗간 7개로는 이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어 풍차의 추가건설이 필요했다. 실제로 1787년까지 포츠담의 풍차는 26개로 늘어났다.

상수시의 풍차는 팔각형 기둥에 바람을 받을 수 있도록 회전하는 지붕을 씌운 형태의 스모크밀(Smockmill)이다. 풍차팔의 회전축이 5.5m에 달하는 풍차의 높이는 25.78m로 13.41m 높이의 돌로 만든 좌대에 12.37m 높이의 나무기둥을 세웠고, 돛의 상단까지는 35.45m에 달한다. 

상수시의 풍차가 유명해진 것은 1787년에 장 찰스 라보(Jean-Charles Laveaux)가 프랑스어로 출간한 책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삶(Vie de Frederic II, Roi de Prusse)’이 이듬해 완곡하게 옮겨져 독일에 소개된 이후다.

이 가운데 상수시 풍차에 관한 내용이 있다. 풍차의 돛이 덜컥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에 예민해진 프리드리히대왕이 방앗간 주인 요한 빌헬름 그래베니츠(Johann Wilhelm Grävenitz)에게 풍차방앗간을 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방앗간 주인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대왕은 “왕권으로 은화 한 닢 주지 않고도 방앗간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그자는 모른답니까?”라고 위협했다. 방앗간 주인은 태연하게 “물론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능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대법원의 결정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일 뿐이며 사실 방앗간 주인은 제분하러 온 농민들을 속이는 교활한 자로서 대왕의 여름궁전이 들어선 뒤로 풍차 날개가 받아야 하는 바람이 약해졌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대왕은 다른 장소에 풍차방앗간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고, 덕분에 방앗간 주인은 2개의 방앗간을 가지게 됐다. 상수시 풍차방앗간과 얽힌 쟁송과 전설은 입헌군주제에서 군주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왕의 정의(king's justice)가 어떻게 구현됐는가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수시 풍차에 관한 이야기는 프리드리히 2세가 1745~1747년 사이에 풍차방앗간이 있는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여름궁전을 지으면서 생긴 것이다. 처음 지었던 풍차는 몇 차례에 걸쳐 주인이 바뀌면서 황폐해졌고, 1786년 프리드리히 2세는 무너진 풍차방앗간을 새로 짓도록 했다. 새로운 갤러리형의 네덜란드 풍차는 1787~1791년 사이에 지었다. 

1840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4세는 상수시 궁전을 사용했기 때문에 풍차의 북쪽에 마구간을 포함하는 주거용 건물, 슈바이처 하우스(Schweizerhaus)를 1839~1842년 사이에 지었다. 1층은 말 마구간으로 썼고, 그 위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거실과 박공 측에 장식된 반목재의 돌출된 다락방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성과 방앗간 사이에 서 있던 소련 전차가 바주카포에 맞아 불타면서 방앗간과 슈바이처 하우스도 같이 불에 탔다. 포츠담시 성립 1000년을 10년 앞둔 1983년 포츠담 상공회의소는 역사적 풍차의 석재기단 복원을 시작했다.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혀 1990년 공사를 중단했다가 여러 재단의 후원을 얻어 1991년 공사가 재개됐다. 1787~1791년 사이에 지은 갤러리형의 네덜란드 풍차를 복원한 것이다.

사연 많은 풍차를 지나 완만한 경사길을 따라 오르면 상수시 궁전(Schloss Sanssouci)의 동쪽 날개에 이른다. 철근을 복잡하게 엮어서 마치 커다란 새장처럼 생긴 문을 지나면 넓은 테라스가 나오고 안쪽으로 양 날개를 펼친 듯 한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의 건물이 앉아있다. 

건물의 외벽은 많은 조각품으로 장식돼있어 아름다운 느낌이 들지만 규모 때문인지 소박해 보인다. 하지만 테라스 끝에서 남쪽으로 펼쳐지는 엄청난 규모의 정원을 보면 벌어진 입을 다물기가 힘들다. 궁전이 있는 맨 위의 테라스에서 비탈길을 따라서 정원의 남쪽 끝까지 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상수시 공원의 전체 면적은 278에이커(ac, 약 1.13㎢)에 달하며 그 안에는 다양한 특성을 지닌 정원들이 들어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베를린 궁정의 화려함과 의식이 넘치는 일상에서 벗어나 쉬는 공간이 필요했다. 게오르그 벤츠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Georg Wenzeslaus von Knobelsdorff)가 프리드리히 2세의 구상을 받아 로코코양식으로 설계해 1745~1747년 사이에 건설했다. 궁전의 이름 상수시는 프랑스 관용어구인 ‘ans souci’에서 온 것인데, 우리말로는 ‘근심이 없는’이라고 옮길 수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입구홀(Vestibül)과 대리석홀(Marmorsaal)이 있어 손님을 맞거나 회의를 하는 공간으로 썼다. 궁전에는 10개의 객실만이 있었다. 건물 동쪽은 왕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알현실, 음악실, 서재, 도서관, 침실 등이 있었고, 건물 ‘숙녀의 날개’라고 알려진 서쪽의 객실은 여성들과 손님들이 사용했다. 

상수시 궁전은 흔히 유럽의 왕실들이 부러워하는 베르사이유 궁전보다는 그 서쪽의 말리 르 로이(Marly le Roi)에 있는 말리성(Château de Marly)을 연상케 한다. 궁전의 디자인과 장식은 프리드리히 2세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돼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로코코 양식이라고까지 한다고 했다. 

테라스의 동쪽 끝에는 프리드리히 2세의 무덤이 있다. 그는 평소에 “나는 철학자로 살아온 것처럼 조촐하게 묻히고 싶다. 해부를 하거나 방부처리 하지 말고, 그저 상수시의 언덕에 내가 미리 준비한 무덤에 묻어다오. 전쟁 중이거나 여행 중에 죽을 경우에는 일단 편한 곳에 묻었다가 겨울이 되면 상수시로 이장을 해다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바라는 대로 상수시 궁전에서 임종을 맞았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이자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의 아버지인 포츠담 수비대 교회에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무덤 옆에 묻었다. 상수시에 묻히고 싶다는 프리드리히 2세의 희망은 독일이 통일된 뒤에서야 이뤄졌다. 

그의 사망 205주년이 되는 1991년에 그의 유골이 든 석관이 상수시 궁전의 지금 묫자리로 이장된 것이다. 그의 무덤 곁에는 평소에 사랑하던 개들의 무덤이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평소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감자 먹기를 권장했고, 스스로도 감자먹기를 실천했다고 한다. 

무덤 위에는 감자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는 왕의 진심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무덤이 있는 동쪽 공원에는 건축가 요한 고트프리드 뷔링(Johann Gottfried Büring)의 설계로 1755~1764년 사이에 지은 상수시 미술관이 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열대과일을 재배했던 온실 부지에 세운 것으로 독일을 통치한 자가 지은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다. 

소박한 모습의 궁전과는 달리 남쪽 언덕을 따라 계단식으로 꾸민 포도원은 장관이다. 6단계의 테라스를 만들고 언덕의 절개면에는 일조량을 늘리기 위해 테라스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도록 옹벽을 쌓고, 깊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 격자로 된 유리창을 냈다. 

옹벽에는 현지 과일나무를 심었고, 169개의 유리격자 안에는 가까운 노이룹핀(Neruppin)을 비롯해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등 외국에서 들여온 포도나무를 심었다. 6단계의 테라스의 끝에는 잔디를 깔고 키 작은 나무들을 심었다. 

테라스의 중앙에 있는 120개(지금은 132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1745년 조성한 잔디밭과 꽃을 심은 바로크 양식의 정원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정원 가운데 큰 연못(Große Fontäne)이라는 원형의 수조가 있고, 그 가운데 분수가 높이 솟아오른다. 수조 주변으로는 4개의 잔디밭이 네잎 클로버처럼 둘러싸고 있다. 

분수대 주위에는 12개의 대리석상을 세웠는데, 비너스(Venus), 머큐리(Mercury), 아폴론(Apollo), 다이아나(Diana), 유노(Juno), 주피터(Jupiter), 마르스(Mars)와 미네르바(Minerva) 등 8명의 로마신과 불, 물, 공기, 흙 등 4가지 요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조각품이다. 루스트가르텐(Lustgarten)이다.

쾌락의 정원이라고 할까? 포츠담에서 가장 오래된 이 정원은 1589년의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무렵 하벨 강변에 있던 르네상스 양식의 정원은 카타리나 선제후의 성에 속했다. 1660년부터 하벨 강변을 매립해 남서쪽으로 확장됐다. 1695년 프리드리히 1세 시절에 다시 확장해 넵튠 연못을 건설했다.

연못에서 보니 분수대 동쪽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쪽은 물론 서쪽으로는 오렌지 궁전에 이어 신궁전으로 이어지는데, 그곳까지는 가볼 여유가 없었다. 오벨리스크로부터 신궁전까지 이어지는 정원의 전체 길이는 2.5㎞에 달한다. 루스트가르텐 동쪽 끝에서 멀리 오벨리스크를 일별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루스트가르텐 동쪽 끝에는 정원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오벨리스크포털(Obeliskportal)이 있다. 입구 양쪽으로 2개씩의 코린트 양식 열주를 세웠고, 열주의 바깥에는 각각 로마신화에 나오는 꽃의 여신 플로라(Flora)와 과일의 여신 포모나(Pomona)의 조각을 세웠다. 

오벨리스크포털을 나가면 쇼펜하우어스트라세(Schopenhauerstraße) 가까이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오벨리스크는 1748년 크노벨스도르프(Knobelsdorff)의 설계로 석공 요한 크리스티안 앙게르만(Johann Christian Angermann)이 제작했다. 오벨리스크를 장식하는 이집트 상형문자는 당시만 해도 번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예술적 상상을 동원해 새긴 것이었다.

6시 무렵 상수시 궁전을 떠나 숙소가 있는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6시 반이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호돌이라는 한식당에서 오삼불고기와 김치찌개로 저녁을 먹었다. 역시 얼큰한 국물이 있으면 개운한 느낌이 든다. 식당이 냉방은 되지 않았지만, 모처럼의 한식에 이열치열이 된 셈이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든 것은 7시 반, 비교적 이른 시간이다. 벌써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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