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인생만큼 길게 느껴지는 어떤 하루가 있어요. 마음에 담아두었던 그날의 기억을 꺼내세요.”
tvN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는 명상을 시작하듯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 진숙(원미경)이 남편과의 졸혼을 선언하기 위해 자식들을 소집하는 내용을 다룬 ‘가족입니다’ 1회에선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은희(한예리)가 명상을 통해 2016년 3월10일로 돌아가는 일, 다른 하나는 상식(정진영)이 등산 중 사고로 1982년 10월13일로 돌아가는 일이다. 명상을 하며 한바탕 눈물을 흘린 은희는 2016년 인연을 끊었던 친구 찬혁(김지석)을 만나고, 새로 온 회사 부대표와 하룻밤을 보내는 ‘사고’를 친다. 같은 시점에 홀로 야간 산행을 떠난 상식 역시 1982년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사고’를 당한다. 은희는 9년 사귄 남자친구와 언니인 은주(추자현), 찬혁까지 인연이 한 번에 끊긴 4년의 시간을, 상식은 ‘사랑하는 숙이씨’에서 ‘돈을 좀 못 벌어온다고 졸혼을 요구하는 아내’가 되기까지의 38년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여정을 시작한다.
‘가족입니다’의 핵심은 가족을 다루는 태도에 있다. 기존 가족드라마가 ‘그래도 우린 가족이니까’를 외치며 가족 만능주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가족입니다’는 ‘가족이지만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의 사연과 기억, 현재의 마음을 헤아린다. 큰 딸 은주와 둘째 딸 은희가 몇 년간 인연을 끊고 산 것과 수년간 고민한 어머니 진숙의 졸혼 선언은 아무리 가족이어도 언제든 파편화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나온다. 화해와 화합의 도구로 ‘가족’을 사용하기엔 이미 늦었고,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걸 등장인물 모두가 알고 있다. “분명 가족이긴 한데 다들 모르겠다”는 막내 지우(신재하)의 대사나 “언니는 나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라는 은희의 대사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펼쳐진다는 암시인 동시에 이미 멀어져버린 가족의 현재 위치를 말해주는 위험 신호다.
그럼에도 ‘가족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존재한다. 단순히 한 집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오랜 시간을 보냈고, 부모님에게 같은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를 말하는 게 아니다. 상식의 사고로 시작된 이야기는 인물들이 감춰온 각자의 비밀을 하나씩 소환한다. 잊고 싶은 어릴 적 기억부터 자식들에겐 말 못할 출생의 비밀, 아내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정체성 등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드라마 한 편이 되기에 충분한 소재들이다. 거짓말처럼 모든 비밀이 하나씩 꺼내지는 과정에서 가족 모두가 흔들리지만, 그것을 수습하는 것 역시 가족이다. 이들은 개인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것을 존중하고 어떻게 잘 수습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진다. 어린 시절부터 은희의 친구이고 지우에겐 형 같은 존재인 찬혁을 가족의 영역에 넣으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외부인은 많지 않다.
8회까지 절반의 분량을 달려온 ‘가족입니다’에 기대하는 건 기존 가족드라마와 다른 결말이다. 그동안 가족 드라마는 친자, 친부모가 확실한 가족이 모여 화목하게 식사하는 전통적인 가족에서 핏줄이나 구성 형태에 상관없는 다양한 대안 가족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엔 분명 의미가 있지만, 결국 완성되는 건 조금 다른 ‘가족’이었다. ‘가족입니다’는 여기서 한 발 나아갔다. 개인을 가족보다 상위에 놓는 관점이다. 타인보다 더 모르는 가족의 현재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대화를 통해 하나씩 메워가는 것. 이는 가족 관계가 아닌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가족이니까’ 행복하다는 추상적인 결말 대신, ‘(겉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가족입니다’라며 개인이 모두 행복한 새로운 가족 형태를 찾아내는 결말을 볼 수 있지 않을까.
bluebell@kukinews.com / 사진=tvN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