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가 차를 세우고 손수레로 먼 길을 돌아가게 된 사연은 이 아파트의 ‘차량진입 금지’ 방침 탓이다. 이 아파트는 이달 1일 안전사고 방지와 시설물 훼손 등을 이유로 단지 내 지상도로 차량 통행을 금지했다. 모든 차량은 지하주차장을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하다.
문제는 지하주차장의 높이다. 상당수 택배 차량의 차체가 주차장의 진입 제한 높이(2.3m)보다 높다보니 진입이 아예 불가능하다. 이에 아파트 측은 택배 기사들에게 손수레를 이용해 택배를 각 가구에 전달하거나 지하주차장을 출입할 수 있는 ‘저상차량’을 이용할 것을 대안으로 통보했다. 택배 기사들은 이를 ‘갑질’로 규정하며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택배기사들은 ‘저상차량’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개조 비용만 수백만원이 드는 데다 높이가 낮아지는 만큼, 허리와 목을 제대로 펼수 없어 피로도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택배기사 A씨는 ”저상 탑차를 4~5개월만 타게 되면 허리와 무릎에 하나씩 병을 달고 살게 된다“라며 ”피와 살을 갈아가면서까지 택배를 배송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고 항변했다.
저상차량을 이용하지 않으면 손수레를 이용해야 하지만 이마저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아파트는 53개동에 약 5000세대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다. 강규혁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공동대표는 “이 아파트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아파트 단지"라며 "직선거리로만 2.3㎞ 전후로 돼 있고, 아파트에서 배송하는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만보기 숫자는 4만보가 넘는다”고 말했다.
이어 “4만보는 물건 하나 들지 않고 운동으로만, 걷기로만, 빠른 걸음으로 해도 4~5시간 걸리는 걸음 수”라며 “맨몸도 아니고 수레에 산더미같은 물건을 끌고 있다. 게다가 비가 오거나 더운 날, 추운 날은 고통이 2~3배가 될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택배노조는 아파트 측에 다른 대안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지난 14일 가구별 개별 배송을 중단하고 아파트 입구까지만 택배를 배송하는 시위를 벌였다. 800여개의 택배가 아파트 앞에 쌓이며 주민과 택배 기사간의 고성이 오갔다. 입주민들은 물품을 받기 위해 단지 입구까지 나와야 했다. 택배노조는 입주민들의 항의 전화와 문자가 잇따르자 이튿날 개별 배송을 재개했지만, 언제든 입구 배송으로 맞설 수 있다는 입장이다.
택배노조의 강경 대응에도 아파트 측은 기존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 명의 초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다는 주부 B씨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택배 차량뿐 아니라 일반 차량까지 아파트 내부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한 조치로 알고 있다”며 “단지 내에서 속도를 높이는 차량들에 사고가 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한데, 이를 방지할 수 있다면 택배를 직접 입구로 나가서 받는 수고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C씨는 “이 곳은 설계 때부터 차가 지상으로 지나다닐 수 없는 공원형 아파트로 지어진 것”이라며 “구조상 차들이 돌아다니면 시설들이 피해를 입기 쉬울 뿐 아니라 사람들이 다칠 위험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차량 진입 금지 방침은 사전에 1년간의 유예기간도 두었던 일”이라며 “이제야 논란이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택배노조는 사태 해결이 될 때까지 아파트 단지 앞에서 촛불집회와 농성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아파트 측에서 1년간 유예기간을 두었다고 하지만 협상이 아닌 일방적 통보였다”며 “입주민 중에서도 택배기사를 응원하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다음주부터는 이번 투쟁에 동참하지 않았던 CJ대한통운과 한진택배 기사들을 만나 설득해 더욱 큰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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