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등 뒤에 수많은 눈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 넷플릭스 영화 ‘제8일의 밤’(감독 김태형)에서 전직 승려 진수(이성민)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막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을 보고, 불쌍한 영혼을 안내하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붉은 눈이 깨어난다는 소식에 진수의 심경은 복잡해진다. 2년 동안 묵언 수행한 청석(남다름)보다 더 굳게 다문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한다.
진수를 연기한 배우 이성민의 표정엔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사연이 묻어있다. 묻지 않아도, 그가 말하지 않아도 과거가 아팠을 거라 느낄 수 있다. 이성민에게도 ‘제8일의 밤’은 그동안 맡은 인물 중 가장 대사가 적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작품이다.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이성민은 양자 역학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발길을 ‘제8일의 밤’으로 이끌었다고 털어놨다.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이 전부일까 하고 생각한 기억이 있어요. 우연히 유튜브로 물리학 강의를 보다가 우리 양자역학과 원자 이야기를 들었어요. 결국은 인간이 사는 우주, 불교로 하면 만물이 원자로 이뤄졌다는 얘기죠. 만약 우리와 다른 시각으로 원자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게 사물을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호기심을 갖고 있을 때 ‘제8일의 밤’을 만났고 출연하게 됐어요.”
이성민이 연기한 진수는 어둡고 무거운 인물이다. 청석이 그를 찾아내기 전까지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어울리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혼자 지내는 방에서도 편하게 있지 못한다. 그가 짊어진 운명, 그리고 가슴 아픈 과거 때문이다.
“진수는 가족이 희생당한 아픔을 가진 인물이에요. 그것이 진수의 가장 큰 고뇌고, 헤어날 수 없는 아픔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지점이 진수에게 주어진 능력, 수많은 영혼을 천도해주는 직업과 대립하면서 고뇌와 고통이 더 심해져요. 그걸 참지 못해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는 인물이죠. 일반 사람들의 고통과 고뇌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진수는 그보다 극단적으로 차 있는 것으로 전 이해했어요.”
이날 이성민은 “연기할 때 덜 외로워졌다”는 말을 꺼냈다. 과거엔 배우로서 혼자 작업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영화와 인물이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2018년 출연한 영화 ‘공작’(감독 윤종빈)이 분기점이었다.
“과거엔 늘 그랬어요. 연기하러 현장에 가면, 그날도 뭔가 이뤄내야 하고 뭔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늘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감독은 모니터에서 내 연기를 어떻게 볼까, 내가 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죠. 윤종빈 감독과 ‘공작’을 찍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바보 같이 일하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감독은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배우 편에 있어주는 사람이고 같이 하는 거란 사실을 알았어요. 그 후로 현장에서 덜 외로워졌고,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어요. 감독님 뿐 아니라 주위 모든 스태프들이. 내가 잘 할 수 있도록, 멋지게 화면에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같이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멍청하게도 그쯤 깨달았습니다.”
‘제8일의 밤’은 처음부터 넷플릭스에서 제작된 영화가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이 늦춰졌고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로 노선을 바꿨다. 많은 작품에 출연한 이성민에게도 넷플릭스 공개는 낯설고 어색한 첫 경험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는 ‘제8일의 밤’이 넷플릭스에서 공개한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낯설고 어색해요. 이 시국의 관객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저에겐 색다른 경험인데, 그 중 하나가 전 세계에서 같은 시간대에 영화를 본다는 사실이에요. 아시아권에서 반응이 좋다고 하니까 기분도 좋아요. 보통 영화가 개봉하면 수치로, 관객 반응으로, 리뷰로 체감하는데, 그런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에요. 어떻게 보면 안타깝고 어떻게 보면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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