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 영화 ‘블랙 위도우’ 중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숨 돌릴 틈도 없다. 영화 ‘블랙 위도우’(감독 케이트 쇼트랜드)는 평화롭게 홀로 시간을 보내는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가 이 한 편의 영화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크게 세 가지다. 사라진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건재한 레드룸과 수장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의 궤멸, 오랜만에 만난 동생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를 비롯한 옛 가족과 화해, 그리고 과거 자신이 죽인 드레이코프 딸에 대한 죄책감 해소다.
레드룸과 가족 서사는 이해가 쉽다. 레드룸은 ‘블랙 위도우’를 지탱하는 기본 구조다. 마블 영화에서 반복되는 히어로 서사엔 반드시 세계 정복을 꿈꾸는 빌런이 등장하고 그를 물리쳐야 한다. 레드룸은 나타샤가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곳이고 스파이로 긴 시간 일한 곳이다. 드레이코프는 레드룸을 나타샤의 ‘집’이라고 표현한다.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성장한 나타샤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거의 상징이다.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함께한 시간이 고작 3년뿐인 위장 가족이지만, 옐레나와 나타샤 모두에게 유일한 가족이다. 다시 혼자가 된 나타샤 눈앞에 등장한 과거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어벤져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해결하는 단서다. 나타샤에게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가족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지 되짚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블랙 위도우’는 극악무도한 빌런을 응징하는 히어로 무비인 동시에 해체된 가족을 되찾는 영화다.
드레이코프 딸과 관련된 서사는 이질적이다. 옐레나에게 레드룸이 건재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타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작전 도중 어쩔 수 없이 제거한 드레이코프 딸에 대한 죄책감이다. 오프닝에 등장한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이용하고 괴롭히며 원치 않은 삶을 살게 한 레드룸과 드레이코프를 향한 분노보다 오래 간직한 죄책감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타샤의 죄책감을 알고 있는 건 관객과 드레이코프 뿐이다. 같은 편으로 싸우는 동료와 가족도 모르는 나타샤의 매우 개인적인 서사는 ‘블랙 위도우’를 구성하는 한 축으로 작용한다. 후반부 반전과 태스크마스터와의 전투에 이르면, 어쩌면 ‘블랙 위도우’는 가족과 히어로보다 나타샤의 죄책감 지우기 스토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없어도 될 것 같은 스토리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드레이코프 딸에 관한 기억은 나타샤에게 수많은 작전 중 하나가 아니다. 아무 죄 없는 어린 여성을 누군가의 지시로 제거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문을 남겼다. 여러 작전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킬러, 혹은 스파이로 살아온 나타샤에게 죄책감과 상처가 긴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 건, 그 일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연관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유독 그 사건이 깊게 각인됐을까에 대한 고민은 나타샤에게도 오래도록 풀지 못한 미스터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나타샤는 드레이코프의 딸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나타샤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길러진 킬러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드레이코프의 딸 역시 그 같은 운명을 선택하지 않았다. 또 나타샤가 지키고 싶은 대상을 대의를 위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일이 주는 아이러니 역시 쉽게 잊히지 않는 이유이지 않았을까.
개인의 죄책감을 자세한 설명 없이 다루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의 과거과 감정을 마음대로 다루지 않는다. 나타샤 개인의 개성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이전부터 나타샤는 미스터리하고 혼자가 익숙한 인물로 그려졌다. 개봉 전 ‘블랙 위도우’에 관심이 쏠린 이유도 나타샤의 과거가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솔로 무비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불필요한 사생활 공개를 막으며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관음을 차단한다. 영화에서 어린 나타샤가 가족과 헤어지는 날과 그 후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오프닝 장면을 제외하면, 드레이코프의 딸 장면이 거의 유일한 과거 회상이다. 대신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나타난 과제를 묵묵히 해결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타샤는 대단한 고민이나 선택을 하지 않는다. 다른 히어로들처럼 고통을 감내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을 길을 걷는 영웅적인 면을 과시하거나,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다.
마블은 네 번째 페이즈의 첫 영화인 ‘블랙 위도우’를 통해 땅에 발붙인 히어로 영화를 예고한다. 세 번째 페이즈의 첫 영화였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지구 평화를 위해 지구를 파괴하는 아이러니를 진지하게 그린 것처럼, ‘블랙 위도우’ 역시 지구를 지키느라 보지 못했던 인신매매와 세뇌로 고통 받는 수많은 어린 여성을 응시한다. ‘시빌 워’가 가상 세계관에 현실적인 관점을 도입했다면, ‘블랙 위도우’는 더 본격적으로 실제 현실의 이야기를 가상 세계관에 녹였다. 나타샤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전처럼 제작진이 맘대로 움직이고 싸우게 만드는 대신, 정말 현실 속 인물처럼 조심스럽게 대한다. 영화가 캐릭터를 얼마나 세련되게 존중할 수 있는지, 이 무해한 히어로 무비가 얼마나 훌륭하고 재밌을 수 있는지 증명한다. 만약 ‘블랙 위도우’가 마블이 앞으로 수년간 그리려 하는 네 번째 페이즈의 예고편이라면 대환영이다. 아니, 제발 그렇게 그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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