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지구 멸망’을 떠올리는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몇 장면이 있다. 환경오염에 의한 기후 변화나 원인 모를 바이러스 유행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시나리오부터 3차 세계대전이나 소행성 충돌처럼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 장면도 있다. 아예 외계인의 침공이나 좀비 바이러스의 확산처럼 영화에서 봤던 이야기도 가능하다. 수많은 상상 중 바다 생명체의 멸종으로 인한 위험은 없다. 바다는 무엇이든 포용하고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넓고 지속 가능한 공간 아니던가. 육지 생명체가 모두 사라져도 바다는 그대로일 것 같은 이미지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진실을 외면한 결과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는 바다에 갖고 있는 인간의 편견과 심각성을 고발하는 영화다. 뱃속에 비닐봉지 30개를 품고 사망한 채 해안으로 떠밀려온 고래를 본 감독 알리 타브리지는 바다를 살리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다. 각종 환경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며 바다에서 쓰레기를 줍는다. 그것만으로 정말 바다를 살릴 수 있을지 의심하던 순간, 일본 정부가 남극 포경을 재개한다는 뉴스를 접한다. 일본에 관심이 생긴 알리는 매년 700마리가 넘는 고래가 학살당한다는 일본 다이지로 떠난다. 일본인들이 왜 고래를 학살하는지 답을 찾던 그는 그곳에서 더 큰 문제를 마주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취재를 이어간다.
평소 환경 문제와 바다 생태계에 큰 관심이 없는 시청자도 재생 버튼을 터치해 볼만한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탐사보도에 몰입한 언론사 기자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금한 사안을 취재해 간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현재 바다가 처한 심각한 상황과 그 원인,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세상에 이렇게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할 때마다 각종 통계자료와 신문 헤드라인을 띄우고 관련 전문가 인터뷰를 삽입해 신뢰도를 높인다. 영화를 볼수록 바다와 지구엔 미래가 없고, 인류는 멸망할 게 확실해 보인다. 당장 뭔가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바다를 둘러싼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확신이 자꾸만 든다.
감독은 사안의 심각성을 알리고 바다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자신이 직접 보고 공부하고 느낀 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고 한다. 평소 좋아했던 바다를 무대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다가 알게 된 사실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다. 곧바로 대책을 세우고 행동에 옮기는 감독의 모습에서 무시무시한 실행력과 강한 호기심을 갖춘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배움과 탐구보다 궁금증을 해소하고 영화가 그리는 암울한 상황에 더 몰입하려는 태도 역시 존재한다. 그 태도가 영화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위험하고 불안하지만 끌린다.
이미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다큐멘터리다. 지속가능한 어업이 불가능하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만큼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감독의 주장이 과장됐다는 논란이 대표적이다. 영화에 인용된 일부 통계가 예전 것이고, 전문가 및 관계자 인터뷰를 원하는 대목만 발췌해 왜곡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시청자들은 과장은 잘못이지만 감독이 말하는 메시지와 방향성엔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몰랐던 바다의 이면을 드러내는 것과 현재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경고하는 역할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감독이 다른 주제로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들이다. ‘씨스피라시’는 부수 어획과 인증 마크 부여하는 협회, 양식, 노예 등 다양한 주제를 연이어 다룬다. 하나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깊이 취재하다가, 논리적인 이유를 들며 새로운 이야기로 빠르게 넘어가고 곧바로 몰입한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감독의 표정과 위기를 돌파해가는 과정은 ‘씨스피라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자신이 궁금한 걸 직접 눈으로 보고 질문하는 과감함과 바다를 향한 진정성, 놀라운 실행력은 이처럼 풍성한 정보를 한 편의 영화에 담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동시에 함께하는 사람 없이 홀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답을 찾는 방식은 처음부터 방향을 정하고 달리는 것 같은 편향된 태도로 읽힐 여지가 있어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수많은 정보 중 무엇을 믿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하는 건 시청자의 몫이다. ‘씨스피라시’는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다. 넷플릭스 목록에 계속 존재할 만하다. 다음에 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나의 문어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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