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까미’였다. 이름은 가졌지만 삶의 권리는 갖지 못했다. 태어나 5년여 간 경주마로 착취당했다. 퇴역 후 대여 업체에 팔렸다. KBS1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장에 동원돼 강제로 고꾸라졌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떴다. 인간의 눈요깃거리로 살다가 눈요깃거리를 위해 죽은 까미. 밑바닥 친 동물권과 생명마저 소품으로 여긴 미디어 업계 관행이 빚은 비극이다.
현실은 수많은 까미들을 외면했다
사고는 지난해 11월2일, '태종 이방원' 7회에서 이성계(김영철)의 낙마 장면을 촬영하던 중 발생했다. KBS는 “제작진이 며칠 전부터 사고에 대비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하지만 사고 당시 영상에는 와이어에 발목이 휘감겨 넘어진 채 바들거리는 까미의 모습만 담겼다. 넘어진 까미를 향해 달려가는 스태프는 아무도 없었다.
동물 대여업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예견된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 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촬영장에선 제작진이 절대적인 ‘갑’이다. 방송 촬영 중 동물의 안전에 대해 관리자가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제작진의 의지에 따라 촬영 여부가 결정된다. 관계자는 “다른 동물보다 말은 소품처럼 활용되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촬영 시 안전 보장이나 피해 보상 등은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라고 꼬집었다. 까미뿐만 아니라 동물이 동원되는 촬영엔 이들의 고생과 희생이 뒤따른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촬영 중엔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동물 역시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서 “동물 복지에 신경 쓰는 현장도 많아지고 있지만, 촬영에 동원된 이상 고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까미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며 동물자유연대와 동물권행동 카라 등 동물권보호단체들은 서울 마포경찰서에 ‘태종 이방원’ 촬영장 책임자를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동물 학대)로 고발했다. 다만 실제 처벌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과거 SBS ‘일지매’, KBS2 ‘연애의 발견’ 등이 동물 학대 논란으로 동물권 단체에 고발당했으나 기소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고의성이 없다는 게 이유다. 현행 동물보호법은 동물을 대상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불필요하거나 피할 수 있는 신체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 및 굶주림, 질병 등에 적절한 조치를 게을리하거나 방치하는 행위를 동물 학대로 규정한다. 동물자유연대 관계자는 “고발된 방송이 여럿 있으나 대부분은 학대의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아 처벌을 피한다”면서 “방송사가 개선 의지를 담은 입장문을 발표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높아진 시민 의식, 제도가 뒷받침해야”
미국에선 비영리기구 미국인도주의협회(AHA)가 1940년대부터 미디어 촬영장에 동원되는 동물의 안전을 감시해왔다. 1980년대에는 영화제작자 등과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을 협의해 배포하고, 이를 지켜 촬영된 영화에 ‘어떤 동물도 다치지 않았음’(No Animals Were Harmed) 인증을 부여해왔다. 해당 가이드라인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영화 제작자들이 이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이유는 미국 사회가 공유하는 생명 감수성 때문이다. 가령 미국 방송사 HBO가 2012년 선보인 드라마 ‘럭’(Luck)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촬영에 동원된 말 세 마리가 사망하자 시즌2 제작이 취소됐다. 말들이 촬영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은 뒤 안락사 당한 사실이 알려지며 시청자의 공분을 사서다.
권위 있는 단체의 존재만큼이나 시민 사회의 협력도 중요하다. 할리우드 리포트는 AHA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호빗 : 뜻밖의 여정’ 등 일부 영화 촬영장에서 벌어진 동물 학대를 은폐하고 이 작품들에 ‘어떤 동물도 다치지 않았음’을 인증했다고 2013년 폭로했다. 동물 보호 단체인 PETA는 영화와 TV 쇼 촬영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동물 학대를 살피고 AHA 인증에도 관여한다. 제작자와 시민단체, 언론사가 서로를 감시하고 협력하며 동물에게 안전한 촬영 환경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는 AHA처럼 영화·드라마 촬영장 내 동물 안전 관리를 감시하는 기관이 없다. 동물자유연대 관계자는 “시민 의식이 발전하고 동물 복지에 대한 사회적 의식도 높아졌지만, 공식적인 가이드라인이 없고 실태를 감독할 만한 공인된 기관도 없다”고 지적했다. 동물자유연대와 카라는 각각 2009년과 2020년 미디어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했지만, AHA의 사례처럼 강제력을 갖지 못한다. 이 관계자는 “최소한 방송사 자체 가이드라인이라도 제작하라고 요청할 예정”이라며 “그래야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방송국 내부 지침을 위반했다며 공식 대응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동물권 단체 케어 김영환 대표는 “동물 학대 논란 작품을 거부하는 운동을 보면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은 이전보다 많이 개선됐다”면서 “동물 실험 윤리 위원회처럼 촬영 전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심의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높아진 시민 의식에 걸맞은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예슬 이은호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