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그랬지. 원치 않았던 과거의 향수가 물씬 느껴진다. 영화가 다루는 배경인 1990년대 얘기가 아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등 뒷골목 건달들을 다룬 영화가 나오던 2010년대 얘기다. 영화는 최선을 다해 제 갈 길을 가지만, 뭔가 중요한 걸 빠뜨린 느낌이 자꾸 든다.
영화 ‘뜨거운 피’(감독 천명관)는 1993년 부산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포구 구암에서 벌어지는 밑바닥 건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마흔이 되도록 손영감(김갑수) 밑에서 만리장 호텔 일을 돕는 희수는 답답함을 느낀다. 손영감을 떠나 시작한 성인 오락기 사업은 성공을 거두지만, 규모가 큰 영도파 건달들이 지분을 요구하며 자꾸만 전쟁에 휘말린다. 영도파 에이스이자 오랜 친구인 철진(지승현)과 마약 밀수꾼 용강(최무성)은 희수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건넨다.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건달 느와르 영화다. 과거 어느 시점,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서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서로를 찌르고 찔리는 건달들의 이야기가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것처럼 그럴듯하게 펼쳐진다. 김언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큼 영화의 세계관과 인물 구도가 탄탄하다. 두 세력이 벌이는 단순한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각자 다른 욕망을 가진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가 이야기를 이끌고 간다. 주인공 외에 다양한 인물이 모두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고 각자 제 역할을 해내는 완결성이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지점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한 가운데 서 있는 희수를 긍정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다른 감상이 가능하다. 영화는 희수가 고민 끝에 선택을 내리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하나씩 실행하며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얼마나 쓸쓸하고 덧없는 일인지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희수의 선택과 행동에 동의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폭력은 어느 순간 의지를 갖는다. 이유가 어찌 됐든 조직을 배신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선택하는 주인공을 끝까지 응원하고 연민하는 건 쉽지 않다. 인물에서 한 발 멀어지면 이 모든 일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고, 결말에 등장하는 메시지에도 닿지 못한다.
철저하게 남자들의 이야기다. 영화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등장해도 남성의 삶을 위한 배경처럼 그려진다. 영화의 정서나 인물을 다루는 방식, 주제 의식 모두 과거에 제작된 영화가 뒤늦게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개봉이 미뤄지기 전인 2020년에 나왔어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오는 2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