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금으로선 T1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 할 것 같아요”, “팬들이 거는 기대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기대에 부응할 자신도 있어서 오히려 더 많은 관심과 기대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T1의 원거리 딜러 ‘구마유시’ 이민형과 처음으로 얘기를 나눈 건 지난해 1월 13일, 한화생명e스포츠전이 끝난 뒤였다. 자신의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정식 데뷔전이었던 이날,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예답지 않은 당돌한 언변으로 기자를 수차례 감탄시켰다.
“전 T1이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어요. 이번에 들어온 민석이도 그렇지만 결국에 잘하는 선수들은 T1으로 오잖아요. 저 역시 T1에서 나가 다른 곳에서 잘하더라도 결국은 T1으로 돌아올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T1과 재계약을 맺으며 ‘테디’ 박진성과의 선발 경쟁을 각오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평범한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날 인터뷰를 통해 기자는 단숨에 이민형에게 매료됐다.
리그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할 숙제를 가진 기자에게, 이민형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취재원이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오늘 해체분석은 한 5등분을 해놨다”, “젠지는 준우승이 어울리는 팀”, “젠지와 담원은 모두 맛있는 상대” 등의 도발성 발언으로 기자를 만족시켰다.
간혹 이러한 워딩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이도 있었지만, ‘룰러’ 박재혁(젠지) 등 상대 선수들의 유쾌한 맞대응이 더해지며 우려의 시선은 점차 흥미로 바뀌었다. 여기에 이민형의 뛰어난 경기력까지 더해지면서 매콤한 말솜씨는 그의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상품성’이 됐다. 이밖에도 그는 동료 ‘페이커’ 이상혁과 자신을 ‘두 개의 태양’이라고 지칭하는 등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나갔고, 데뷔한 지 1년 만에 T1에서 이상혁 다음가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이민형이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는 다소 괴리가 있다. 기자가 아는 그는, 상대를 존중할 줄 안다. 라커룸에선 멤버들이 의지하는 든든한 리더다.
이를 알아 챈 일부 팬들은 이민형을 두고 ‘만들어진 스타성’이라며 농담하곤 한다. 그러나 ‘만들어진 스타성’이라는 말엔 어폐가 있다. 스타성이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뛰어난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리그에 속속 등장했지만, 이 가운데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오래 회자되는 선수는 몇 되지 않는다.
LCK가 프랜차이즈 제도를 도입하면서 리그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각 구단과 리그의 노력은 이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선수에게 스폰서가 붙기도 하는 업계 특성상, 최근에는 선수 개개인의 노력도 요구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취재 동안 만난 대부분의 선수들은 인터뷰에 소극적이었고,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에도 소홀했다. 일부 구단은 비시즌 인터뷰 신청에 “선수가 피곤해한다”며 인터뷰를 거절하기도 했다.
1세대 프로게이머인 ‘캡틴잭’ 강형우(은퇴)는 지난달 ‘와일드리프트 챔피언스 코리아(WCK)’ 유튜브 콘텐츠에서 이러한 프로 선수들의 태도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롤스터 와이의 ‘루나’ 최우석과의 대화에서 “요즘 선수들이 인터뷰할 때 너무 조용하다. 그 기회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모르더라”며 “(인터뷰는) 선수로서 주목 받을 수 있는 기회다. 나는 인터뷰 때 춤도 췄다. ‘관종’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민형은 기자가 만난 선수들 중 가장 인터뷰에 적극적이다. 리그에서 마련한 콘텐츠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참여한다. 펜데믹 시대, 팬들과의 유일한 소통창구라고 할 수 있는 개인방송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시즌이 종료된 최근에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개인 방송을 열어 팬들과 만나고 있다.
이민형은 지난 12일 쿠키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스토리가 있는 걸 더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며 “인터뷰나 개인방송에서 도발이든 자신의 이야기든 그런 서사가 있어야 경기에 더 몰입이 되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가치관을 전했다.
그는 “내가 방송을 켜서 행복해 하는 팬들이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자주 키고 있다. 팬들과의 소통도 재밌다”면서도 “경기력 외에 프로 선수가 가져야 할 덕목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자기관리와 프로마인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건 경기력으로 이어지긴 한다”고 ‘기본’을 강조했다.
물론 모두가 이민형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T1의 조 마쉬 CEO는 “구마유시가 LCK 선수들이 조용하고 내성적일 것이라는 인식을 바꾸면서 LoL e스포츠 판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더 많은 선수가 구마유시처럼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성격이 자신감 있고 외향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선수 자신의 성격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구마유시는 선천적으로 외향적이며 자신감이 넘친다. 그래서 그가 보이는 자신에 대한 믿음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그의 트래시 토크는 인위적이지 않다. 더 많은 선수가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외향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자신의 평상시 성격과 일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조 마쉬는 선수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약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LCK 선수들을 만나본 만큼, 선수 중 재미있고 또 유쾌한 성격을 가진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을 마케팅하고 또 브랜딩하기보다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에 집중할 뿐”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앞서 젠지의 아놀드 허 사장은 “선수들은 예전엔 SNS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젠 팬-스폰서들은 팀의 공식 계정이 아니라 선수 본인들의 계정으로부터 직접 답을 듣고자 한다”며 선수들의 적극적인 SNS 운영을 주문한 바 있다. 시장이 프로 선수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경기력만이 아닌 셈이다.
이적이 잦고 커리어 수명이 짧은 프로게이머의 특성상 개개인의 브랜드 가치는 어느 종목보다 중요하다. 리그나 팀의 발전을 떠나 스스로의 몸값과도 연관되는 문제다. 부디 리그에 더 많은 ‘구마유시’가 생기길 바라본다.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