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기 안양 사는 40대 직장인 서영근씨는 명절마다 한바탕 논쟁을 벌인다. 정당에 가입해 활동할 정도로 열성적이진 않지만, 정치가 삶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는 생각에 진보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척들은 보수 성향이 뚜렷하다. 어떠한 정치 이슈든지 보수정당의 의견을 지지하는 까닭에 행여 명절에 정치 얘기가 나오면 가족 간의 논쟁은 이제 일상이다. 지난해부터는 가족들이 모이더라도 정치 얘기는 피하려고 한다.
#2. 경기 남양주 사는 민주당 당원인 50대 박연진씨 경우도 비슷하다. 고향은 대구이지만 일찍 서울에 올라와 생활했던 터라 부모님과는 다른 정치적 성향이다. 얼마 전 고향집을 찾아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보다가 보수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모녀 서로가 ‘가짜뉴스’에 현혹됐다면서 말다툼하다가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서로 공감하는 때도 있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에 비해 명절이 가지는 의미가 줄어들긴 했지만, 정치권은 명절 밥상머리 대화 주제 선점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민족의 대명절인 설이나 추석 보름 전부터 최대한 부정적인 이슈들은 피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들로 채우려는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정치권이 명절 민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파급력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발달로 정보의 지역적 불균형은 줄어들었지만, 지역·세대·진영을 아울러 가족들이 교류하는 민족 대행사인 만큼 그 여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를 반영하듯 설 연휴를 앞두고 여야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검찰이 지난 9일 ‘대장동 특혜 의혹’ 관련 수사를 명분 삼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소환을 요구하자 민주당은 “설 밥상에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올리려고 한다”며 반발했다.
김성환 정책위의장은 1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정권의 안보참사, 외교참사와 경제 무능이 설 밥상에 오르려 하자 검찰이 야당 대표 소환으로 이를 덮으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말 북한 무인기가 우리 상공을 침공했던 사건도 이번 설 명절 주요한 설날 밥상머리 화두다. 민주당은 설 연휴 직전인 19일 여야 원내대표 합의대로 국방위 전체회의를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설날 민심을 의식한 것인지 국민의힘은 설 연휴 이후에 열자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26일 개최로 잠정 합의했지만, 변동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정치권의 의도와 다르게 명절 밥상머리 주제에 오르는 때가 있다. 지난 14일 해외순방길에 올라 UAE 주재 아크부대를 찾은 윤석열 대통령의 ‘이란 주적’ 발언은 이번 설 연휴 가장 주목받는 화두일 걸로 보인다. 아울러 국민의힘 전당대회 후보에 대한 얘기가 주목된다.
정치전문가들은 과거보다 그 의미가 줄어들었지만, 명절이 정치권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는 꽤 크다고 입을 모았다. 성별·세대·지역을 관통하는 교류의 장이 만들어지니 사안에 따라서는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정치평론가이자 데이터 전문가인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소장은 20일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오래전부터 명절은 세대, 지역, 직업, 성별을 초월해 의견이 교환되는 장으로 ‘민심의 용광로’ ‘장터 효과’ 등으로 불려 왔다. 일종의 민심의 분기점이라고 보면 된다”며 “정치권에서는 최대한 부정적인 것은 차단하려는 노력 위주의 모습을 보여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배 소장은 “이번 설 명절에는 여당의 차기 당권주자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 중심에는 나경원 전 의원이 있다. 나경원 전 의원이 당대표 출마에 장고하는 것도 자칫 설 명절 민심 후폭풍이 일 수 있다는 판단에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그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검찰의 소환을 포함한 사법리스크, 윤석열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실언 논란 등이 설날 밥상머리 주제로 언급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천하람 국민의힘 혁신위원도 정보교류 효과를 언급했다. 천 위원은 같은 날 쿠키뉴스에 “지역에 있는 부모 입장에서는 수도권에 나가 있는 자녀들이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꽤 굉장한 의미가 있다. 특히 선거가 있는 때면 영향을 꽤 미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명절은 지역뿐 아니라 세대별로도 섞이는 행사”라며 “지역의 민심이 수도권에 전해질 수 있고, 수도권의 여론이 지역 민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