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미국 정보기관이 용산 대통령실을 도감청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동향’ 등을 파악하려 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사실상의 첩보전의 일환으로 세계 각국의 정보 전쟁에서는 동맹국도 배려 대상이 아니라는 게 다시 입증된 셈이다.
과거 미국의 도청 사례에 다른 우방들은 강경한 기조를 보이면서 할 말은 했다면 한국 정부는 매번 뜨뜻미지근한 반응 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번 도감청 의혹에 대해서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해서 대응책을 한 번 보겠다”고 말했는데 어떠한 대응이 나올지 주목된다.
미국의 한국 정부 감청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대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고용해 미국 의회 의원들을 포섭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1976년 10월 15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는데 정보의 출처는 CIA의 청와대 도청 자료였다.
도청 사건 후 우리 정부는 미국을 향해 아무런 항의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의 창문을 3중 창문으로 바꾸고 키스트(KIST)에 도청 방지 장치를 개발하라는 주문만을 했을 뿐이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극심한 대립 중이던 박 대통령의 처지가 반영된 것이다.
항의 목소리는 오히려 시민사회에서 나왔다. 대한상이군경회를 필두로 대한반공청년회와 대한전몰군경유족회 등이 나서 “민주 자유 수호를 위해 함께 싸운 맹방으로서 국가원수 집무실에 대한 도청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궐기했다. 국회도 미국 정부의 해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하기도 했다.
2013년 6월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우방국을 대상으로 도청했다는 내부고발이 나와 전 세계가 뒤집혔다. 메르켈 독일 총리를 포함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등 정상급 인사들까지 도청 대상에 포함돼 논란이 됐으며, 한국도 핵심 도청 대상에 포함됐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은 미지근했다.
반면 다른 각국 정상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면서고 강경했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도청 파문이 일자 미국에 명확한 해명과 책임자 처벌까지 강력히 요구했다. 프랑스도 진상규명을 주문했으며 당시 미국과 EU(유럽연합) 사이 추진 중이던 FTA 협상이 난항을 겪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는 미국의 도청 파문에 대한 불만 성토의 장이 됐을 정도로 미국을 향한 불만 여론이 들끓었다.
불편해진 우호 관계 회복을 위해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스키를 타다 부상을 당한 메르켈 총리에게 직접 안부 전화를 걸어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일까지 있었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10일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도청은 명백한 국제범죄이자 불법이다. 더 나아가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이번 정부는 미국의 행태에도 ‘동맹을 흔들 사안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화를 내지 않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국민과 야당에게는 화를 잘 내면서 우리 주권을 침해한 미국에 대해서는 저자세로 나가는 모습은 옳지 않다”며 “한미동맹은 동맹대로 하면서 주권 침해 행위에 대해서는 고자세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