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영업시간 외 국민들의 의약품 구입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2012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판매제도’가 10년째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을 확대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와 약물 오남용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약사들의 우려가 서로 부딪히며 나아가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고 있는 것이다.
편의점 안전상비약은 현재 해열진통제 5종, 종합감기약 2종, 소화제 4종, 붙이는 소염진통제(파스) 2종으로 구성된 13개 품목이 판매되고 있다. 약사법에서는 안전상비약을 20개 품목 이내의 범위로 규정하고 있지만, 2012년 보건복지부가 13개 품목을 지정한 이후 처음 결정된 상태 그대로다.
알러지약·비염약·지사제 등 품목 추가 원하는 수요 증가
편의점 안전상비약 덕을 본 시민들은 품목 확대를 바라고 있다.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이화영(가명·40) 씨는 “애들이 밤에 자주 아프니까 비상약을 항상 집에 구비해 두는데, 얼마 전 아이가 열이 나 약을 먹이려고 보니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며 “약국은 문을 닫은 시간이었고, 급하게 편의점에서 해열제를 사 먹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회사원인 박규현(가명·36) 씨는 “주말에 열이 나고 감기가 심해도 응급실 가기는 부담스럽다”며 “그럴 때마다 편의점에서 산 진통제나 감기약으로 버틴다”고 했다.
편의점 안전상비약에 대한 시민 만족도는 높다. 안전상비약 시민네트워크가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수요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6.8%가 ‘편의점에서 안전상비약을 구입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답했다. 편의점 안전상비약을 구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휴일, 심야시간에 급하게 약이 필요해서’(68.8%)인 것으로 나타났다.
편의점 안전상비약 구입 경험이 있는 사람 중 62.1%는 ‘품목 수 확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확대를 원하는 약의 종류는 종합감기약, 알러지약, 비염약 등 다양하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이현희(가명·39세) 씨는 “엄마들은 보통 아이가 아프면 종합감기약, 기침약, 콧물약 등 증상별로 약을 산다. 증상에 따른 어린이용 감기약이 늘었으면 좋겠다”며 “병으로 된 약은 먹이기도 힘들고 한 번 개봉하면 유통기한이 짧아서 파우치 형태로 된 제품을 더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유치원 교사인 김연지(가명·29) 씨는 “비염약을 팔았으면 좋겠다”라며 “비염이 심해서 자기 전에 약을 먹어야 잘 수 있는데, 약이 떨어져 잠을 한숨도 못 잔 경험이 있다”고 토로했다.
시민네트워크 조사에서 요구가 가장 많았던 품목은 ‘지사제’였다. 이영주 소비자공익네트워크 사무총장은 “10명 중 7명꼴로 지사제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며 “어린이용 감기약, 소화제 등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형성된 것은 응급상황 시 접근이 용이한 편의점 안전상비약을 찾는 영유아 부모들의 발길이 많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약사가 복약지도 해도 오남용 발생…품목 확대하면 사고 급증”
약사들은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에 회의적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약물 오남용’ 우려다. 약국에서 약사가 언제, 얼마나,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 복약지도를 해도 의약품 오남용 사례가 발생하는데, 계산만 하면 끝인 편의점에서 품목 확대까지 이뤄진다면 오남용 사고가 급증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민필기 대한약사회 약국이사는 “의약품 오남용 사례는 최근 10년 사이 크게 늘었다”며 “아세트아미노펜 성분 의약품의 부작용 보고 현황을 보면 2013년 963건이던 부작용 보고 사례가 2015년 1967건으로 2배 이상 급증했고, 2018년 3464건으로 또 다시 2배가량 치솟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안전상비약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몰라도 먹어도 부작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술 마시고 머리 아프다며 편의점에서 타이레놀 사먹는 사람도 봤다”며 “국민건강 증진 차원에서 편의점 약 구매는 최소화하고 약국에서 약사 상담 후 약을 복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365일 쉬지 않고 새벽 1시까지 운영하는 공공심야약국 확대가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 논쟁을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공공심야약국을 운영하는 A약사는 “밤 11시 넘어서 생후 50일 된 아기의 약을 사러 온 어머니가 있었는데, 복약지도를 하며 몇 마디 조언 해주니 고마워하며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면서 “약사는 약 전문가니까 몇 마디 말로도 약국을 찾는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추가 약품에 대해 시민과 전문가, 관련 단체 등이 모두 공감한다면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을 확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태길 보건복지부 약무정책과장은 “시민 수요와 전문가 의견이 일치하는 제품이 있다면 종합적으로 검토해 품목 추가를 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