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가 오래 남는다? ‘데블스 플랜’의 반전

강한 자가 오래 남는다? ‘데블스 플랜’의 반전

기사승인 2023-10-17 06:00:43
‘데블스 플랜’ 촬영 현장. 넷플릭스

“마지막 회까지 최대한 탈락자가 없는 게 목표.” 귀를 의심했다. 승자독식 구조의 생존 예능에서 탈락자 최소화를 꿈꾸다니. 지난 10일 최종화가 공개된 넷플릭스 ‘데블스 플랜’은 생존 예능 사상 처음으로 공리주의를 화두로 올렸다. ‘약자들의 보호자’를 자처한 과학 유튜버 궤도 때문이다. 그는 12부작으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에서 ‘피스(생존과 직결되는 게임 화폐)를 나누자’거나 ‘탈락자를 줄이자’는 태도를 줄곧 유지했다.

궤도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생존 예능의 오랜 법칙에 균열을 냈다. 그는 약한 자도 살리려 했다. 덕분에 준결승전에 오른 인원이 7명이나 됐다. 앞선 게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이가 절반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연출자가 “탈락자 수를 예측할 수 없어 참여 인원을 유연하게 설정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준결승에 오를 줄 몰랐다”고 했을까. 시청자 반응은 극과 극이다. 유튜브 등 온라인에선 “선한 의도가 앞서는 캐릭터로서 제 역할을 했다”는 의견과 “평화주의자인데 독재적이기도 하다”는 평가가 맞섰다. 논쟁은 프로그램 인기에 불을 지폈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데블스 플랜’은 공개 일주일 만에 글로벌 TOP 10 TV쇼(비영어) 부문 3위에 올랐다.

‘강함’을 다시 정의하다

그런데 잠깐.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물리적 힘이 세다’거나 ‘수준이나 정도가 높다’는 뜻이다. ‘데블스 플랜’에 적용하면 ‘두뇌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가 되겠다. 하지만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한 배우 하석진조차 자신이 가장 똑똑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16일 서울 안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각각의 게임에서 내가 보여준 능력치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자평했다. 결승 라이벌이었던 궤도를 가리켜 “혼자서 5~6인분을 해낸 똑똑한 플레이어”라고도 했다. 이런 ‘슈퍼 두뇌’를 상대로 자신이 이길 수 있었던 건 “2~3일까지 ‘즐겜러’(게임을 즐기는 사람)로 지내서 정신적인 체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때로는 이기기 위한 전력투구보다 상황을 받아들이며 이완하는 것이 더 강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데블스 플랜’ 스틸. 넷플릭스

힘의 세기나 지능의 높낮이라는 틀을 벗어나면 다양한 종류의 강인함이 보인다. ‘데블스 플랜’ 안에서도 그렇다. 하석진은 “(박)경림 누나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 뭐든 해보려는 동재(일반인 참가자)의 혈기왕성함,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는 시원의 능력 등을 보며 나도 많이 배웠다”고 돌아봤다. 때론 타인의 손에 목숨을 맡기는 것도 능력이 된다. 경매 게임이 대표적이다. 판돈이 클수록 이길 확률이 큰 이 게임에서 하석진은 밑천 모을 연합을 꾸리지 못했다가 수세에 몰렸다. 궤도와 힘을 나눈 출연자들은 무난하게 점수를 땄다. 협력이 생존 전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일각선 ‘일부 출연자가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무임승차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프로그램을 기획·연출한 정종연 PD는 “경매 게임은 전체 서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라며 “궤도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고 연합도 헐거워진 계기”라고 분석했다.

생존 예능이라는 사회 실험

생존 예능은 실패 한 번을 경험한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와 닮았다. 게임 실력으로 생존의 정당성을 따지는 반응도 능력주의의 축소판 같다. 그 안에서 발견하는 인간 본성은 의외로 다양하다. 상반기 히트작이었던 웨이브 ‘피의 게임’ 시리즈를 연출한 현정완 PD는 과거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생존 앞에서 인간은 생각보다 선하다. 이타적인 사람이 오래 살아남는다”고 했다. 궤도의 ‘다자 생존 전략’을 지켜본 정 PD도 “현실에서 궤도 같은 유형은 천사”라며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존 예능이라는 사회 실험이 얼마나 더 진화할지 지켜보는 일도 팬들에겐 즐거움이다. 정 PD는 “시즌2 제작은 넷플릭스가 결정하지만, 저는 (시즌2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뒀다”며 후속 시즌 제작을 소망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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