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발생한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자 유족과 정신질환자 가족,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환영했다. 이들은 이번 판결이 ‘중증 정신질환자 국가책임제’를 실현하는 디딤돌이 됐다며 정신질환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희망했다.
법률사무소 법과치유, 법무법인 (유)지평, 사단법인 두루,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17일 공동으로 온라인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국가 배상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4부(부장판사 박사랑)는 지난 15일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원고 4인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총 4억여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지난 2019년 조현병을 앓던 안인득(46)씨가 같은 아파트 주민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다. 2021년 11월 이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 경찰의 안일한 대응이 참사로 이어졌다며 국가를 상대로 5억4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지 2년 만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안씨가 범행 전 6개월간 이상행동을 보여 112에 수차례 신고됐지만 경찰의 조치가 없었던 점 등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안씨에 대해 진단과 보호 신청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은 것은 현저하게 불합리하며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경찰이 행정입원 신청을 요청해 실제로 안씨가 입원했다면 적어도 방화·살인을 실행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경찰의 직무상 의무 위반과 피해자의 사망·상해 간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정신건강의학계는 이번 판결에 대해 정신질환으로 인한 비극을 예방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백종우 신경정신의학회 법률사회특별위원장은 “안씨는 2010년부터 치료를 받던 7년간 호전됐고 지역사회에서 생활이 가능했다. 적시에 국가에 의한 치료가 이뤄졌다면 22명의 생명이 죽고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이러한 비극을 예방할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판결을 계기로 중증 정신질환으로 자·타해 위험이 있어도 보호의무자 입원 제도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와 경찰, 소방당국이 행정입원과 병원 이송에 소극적이었던 관행이 사라져야 할 것을 강조했다. 백 위원장은 “모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며 “경찰과 소방당국은 적극적인 정신건강 교육과 함께 응급입원을 시키려고 해도 받아줄 수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해 헤매는 일이 없도록 정신건강 전문가와의 핫라인을 구성하고, 병상 안내시스템 등 지원체계를 보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수면 위로 드러난 커다란 비극 뒤에는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픔이 매일 수많은 환자와 가족에게 반복되고 있다”면서 “중증 정신질환의 급성기 치료와 지역사회 케어를 필수의료로 지정해 후진적인 치료 환경을 개선하는 등 혁신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유족 측 변호를 맡은 오지원 법과치유 변호사는 “치료 중단 이후 자·타해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 의심자에 대해 경찰이 법과 매뉴얼을 준수했다면 범죄를 예방할 수 있었다고 본 최초의 판결”이라면서도 “비슷한 문제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며 국가를 향해 후속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오 변호사는 “치료 중단으로 방치되면서 본인도 원치 않게 범죄자가 돼버리는 사례들이 계속되고 있다”며 “경찰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 차원에서 현재 시행하는 매뉴얼의 배포와 교육방식보다 훨씬 강화된 변화를 강구해야 한다. 실질적인 역량교육과 훈련 등 개선방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경찰서와 파출소 간 협력과 연계 강화 △현장의 고충 등을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예산과 인력 배정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경찰, 지자체 담당자의 정기적인 협동 교육훈련 실시 등을 제안했다.
정신질환자 가족들도 이번 판결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 제도 폐지를 강력히 촉구했다. 조순득 정신장애인가족협회장은 “이제는 정부와 국회가 보호의무자 제도 폐지에 대한 결단을 내려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법무부가 1심 판결을 받아들여 항소하지 않을 것도 당부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