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생명 불씨 꺼지지 않도록”…온몸으로 막아내는 의사들

“작은 생명 불씨 꺼지지 않도록”…온몸으로 막아내는 의사들

기사승인 2024-05-22 06:00:30
20일 오후 분당차병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에서 진료가 이뤄지고 있다. 사진=신대현 기자

24시간 365일 소아 응급·중증환자를 보는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는 ‘살얼음판’ 같은 곳이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며 매 순간 위험천만한 상황을 맞닥뜨린다.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을 걷는 의료진이 아이들의 생명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지원을 강화해달라고 호소한다.

22일 의료계에 따르면 수년째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며 가까스로 버텨오던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전공의 집단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이 장기화되고, 필수의료 인력 확보에 지장이 생기면서다. 보건복지부가 소아 응급진료의 특수성을 고려해 2016년부터 순차적으로 지정한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는 전국에 11곳이 운영되고 있다.

전국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의 균열은 점차 커지고 있다. 2021년 지정된 양산부산대병원은 교수 6명이 센터를 지켜왔는데, 잇따라 2명이 그만두면서 4명이 됐다. 병원은 이 인원으로는 운영이 힘들다고 판단했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8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진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가 소아청소년과 교수 5명이 대신 당직을 서겠다고 자원하면서 정상 운영으로 선회했다.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의사들의 사직은 이 병원만의 사정이 아니다. 국내 첫 센터로 지정된 이후 7명의 전문의가 수많은 응급환자를 봐온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에 남은 의사는 이제 단 1명뿐이다. 이곳은 지난 3월부터 일주일에 이틀만 환자를 볼 만큼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한 처지에 놓였다.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들의 연이은 위기 상황에 다른 센터 의료진까지 긴장하고 있다. 지난 20일 기자와 만난 박수현 분당차병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교수는 “전공의 등 추가 의사 인력 없이 응급·중증 소아 환자를 매일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부담이 된다”며 “몇 안 되는 소아응급실이 인력 부재로 인해 축소 운영하거나 문을 닫으면서 남아있는 곳들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2017년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로 지정받은 분당차병원은 9명의 교수가 경기 동남부권역의 소아응급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3교대 근무로 24시간 휴일 없이 센터가 돌아가려면 최소 6명의 전문의가 필요하다. 센터의 규모와 하루 환자 수, 환자 중증도, 의사의 연구나 학술 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이보다 더 많은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인력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할 정도로 어렵다. 응급의학과 중에서도 세부 분과인 소아응급의학을 전공하는 의사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박수현 분당차병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교수는 20일 “소아응급의료체계가 위기에 처해있다”며 “소아응급의학의 대를 잇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신대현 기자

박 교수는 “소아청소년과도, 응급의학과도 필수과이면서 동시에 기피과다. 이 두 진료과의 교집합 같은 소아응급의학을 선택하는 사람이 없는데 추가 인력을 뽑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면서 “더 큰 문제는 가르칠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아응급의학의 대를 잇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아픈 아이들이 잘 치료받으며 좋아지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아서 소아응급의학 의사가 됐다. 아이들이 미소 지으면 따라 웃고, 눈물을 흘리면 함께 슬퍼했다. 골든타임을 놓쳐 결국 살리지 못했을 땐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시달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밤잠을 설쳤다. 환자가 잘못됐을 경우 민·형사 소송을 걱정해야 했고, 언제든 범죄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항상 사직서를 품에 넣어둔 채 생활했다. 당장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간 치료한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되뇌었다고 했다. “아직은 아니다”라고.

박 교수는 “현재 사직과 인내의 경계에 있다. 의료공백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사직을 계속 고민했다. 이 일을 평생 하기 어렵겠단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라며 “남아서 자리를 지키는 동료들을 보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인내했다”고 털어놨다.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가 잘 운영되려면 응급처치 후 입원 상태를 살피거나 수술할 수 있는 배후 진료과 의사를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박 교수는 “단순히 소아응급실을 늘려 ‘응급실 뺑뺑이’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일차원적인 접근이다”라며 “소아 진료의 미래는 얼마나 다양한 배후 진료과 의사를 두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후 진료과 없이 환자를 받았다간 오히려 골든타임 안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짚었다.

전공의들의 복귀를 촉구하며 연일 압박 수위를 높인 정부를 향해선 “젊은 의사들이 필수과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강압적인 명령이나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필수과 의사의 씨를 말려버리겠단 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일방적인 정부 정책은 의료비만 높이고 치료율을 떨어뜨릴 뿐이다”라고 직격했다. 이어 “이번 사태를 겪으며 더 이상 의료진의 사명감과 희생만으로 의료 현장이 유지될 수 없단 것을 느꼈다”며 “미래의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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