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익숙하다. 이름 있는 병원이라면 만사 제치고 찾아간다. 인근에 텐트를 치고 밤샘을 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 병원에 들어가 집에 돌아오면 늦은 저녁이다. 한 번에 200만원 이상 지불해야 하는 시술비가 벅차 지원금을 더 준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고려한다. 그나마 일련의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들은 참아볼 수 있지만, 거듭되는 실패는 마음을 깎아내려 견디기 어렵다. 임신만 된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린 ‘난임 부부’다. 치료 과정은 우리에게 긴 ‘여정’이다. 어떤 이는 ‘마라톤’에 비유한다. 우리 부부의 여정을 쿠키뉴스를 통해 전한다. <편집자주> |
“시험관 시술(체외수정)을 하면 직장 일을 병행하기가 버거워 여성은 휴직을 하게 됩니다. 직장을 다니며 난임 시술을 하는 가족은 회사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거나 상사가 배려해 줘서 가능한 겁니다. 저도 병원에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게 민폐처럼 느껴져서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김지혜·가명·30대)
난임 부부들이 퇴사를 감수하면서 시술을 이어가고 있다. 임신에 성공한 뒤 새 직장을 구하는 데 애를 먹으며 경력 단절에 빠지기도 한다. 이들이 아이 갖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사회적 인프라가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난임 치료 휴가는 법정 휴가로 보장돼 현재 연간 3일(유급 1일)을 쓸 수 있다. 내년부터는 6일(유급 2일)로 늘어난다. 임신 초기인 11주 이내 유·사산 휴가기간은 현행 5일에서 10일로 연장한다. 하지만 난임 부부들은 이 역시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라고 입을 모은다. 성공적인 임신을 위해선 일주일에 2~3회 병원에 꾸준히 가서 질 초음파와 난소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배란 전까지 난포 성장을 관찰하고 약으로 호르몬 변화를 조절하며, 배란일을 예측해야 한다.
오전에 휴가를 내도 병원 ‘오픈런’을 하지 않는 이상 오후 출근 시간을 맞추기 힘들다. 주말에는 대기 인원들로 병원이 가득 차 앉을 곳도 마땅치 않다. 둘째 아이를 시험관 시술로 가진 김현성(가명·40대)씨는 “금전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가장 부담스러웠던 점은 난임 치료 날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오전 반차를 쓰고 아침 7시30분에 첫 진료를 예약해도 대기 줄이 길다”며 “진료를 마치고 회사에 도착하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라고 했다.
난임 직장인이 호르몬 변화에 맞춰 매번 병원을 방문하긴 쉽지 않다. 일과 병원 치료를 병행하다 보면 으레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김지혜씨는 “회사를 다니며 시술을 시도했지만 일 때문에 병원에 못 가게 됐고,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면서 “난임 휴가를 다 쓰고 개인 연차까지 소진했다. 회사는 병원에 자주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실제 난임 시술을 받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이 적지 않다. 2022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간한 ‘난임 여성노동자의 난임 치료 휴가제도 인식 및 이용 실태와 정책과제’ 보고서를 보면 임금노동자 527명 중 39.7%(318명)가 시술 과정에서 퇴사를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비정규직의 퇴사 경험률이 56.6%로 정규직 36.5%보다 20.1%p(포인트) 높았다. 난임 시술을 받다가 퇴사한 209명에게 퇴사 이유를 물었더니(중복응답) 47.8%는 ‘시술 때마다 상사나 동료의 눈치가 보였다’라고 답했다. 59.3%는 ‘난임 시술을 위해 개인 휴가를 계속 갖기 어렵거나 사용할 수 있는 휴가제도가 없었다’고 했다.
난임 직장인들은 치료 휴가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연구원이 난임 시술을 진행 중인 653명을 추가 설문한 결과, 현행 휴가 일수(3일)가 충분하다는 응답은 6.1%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기간을 더 줘야 한다고 답했는데, ‘1개월 이상 연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39.7%에 달했다. 92.7%는 ‘건강 관리 등 난임 시술을 준비하고 집중하기 위해 난임 휴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연구원은 “지금의 난임 치료 휴가는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많은 만큼 기간을 연장하고 그 기간의 임금을 보전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송수연 세종충남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난임 환자들은 아침 일찍 진료를 보지 않으면 제시간에 맞춰 출근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시술을 시작하면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병원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1년에 3일이라는 휴가 기간은 굉장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난임 휴가로 인해 근무에 공백이 생겼을 때 다른 직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추가 수당 지급, 인력 보충 등을 정부가 뒷받침한다면 장기적 관점에서 출산율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난자 동결’ 늘었지만…비용 부담 여전
직장을 다니면서 난자 동결을 고려하는 부부들도 적지 않다. 난자 동결은 난자를 냉동해 보관하는 것으로, 원할 때 해동한 뒤 시험관 시술에서 활용할 수 있다. 과거엔 암 환자들이 항암 치료를 앞두고 가임력을 보존하기 위해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취업·결혼·출산 연령이 늦춰지고 경력 단절이나 육아 부담을 고민하는 여성이 늘면서 난자 동결 시술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복지부에 따르면 전국 의료기관에서 보관 중인 냉동난자의 개수는 2020년 4만여개에서 지난해 10만개를 넘기며 약 2.5배 증가했다. 차병원그룹 산하 5개 난임센터에서 취합한 미혼 여성의 난자 동결 시술 건수는 2014년부터 2022년까지 누적 4563건을 기록했다. 냉동난자 수만 3만9042개에 이른다. 차병원그룹은 지난 1999년 세계 최초로 난자은행을 설립했다. 난자 동결보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긍정적이다. 분당차병원 난임센터가 출산 전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난자 보관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미혼 여성의 69.8%가 동결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여성의 가임력은 만 25세 이후부터 꾸준히 감소한다. 만 37세부터는 감소폭이 커진다. 전문가들은 출산 계획이 있다면 가급적 빨리 난자를 냉동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전한다. 신지은 잠실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33세에 결혼해서 7년간 아이 없이 지내다가 40세가 다 돼서 아이를 갖기 위해 병원을 찾는 사례가 이어지는데, 30대와 40대의 가임력은 크게 차이가 난다”면서 “난임에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조금이라도 젊을 때 난자 동결을 받길 바란다”고 권했다. 주창우 서울마리아병원 부원장도 “가장 좋은 것은 예방”이라며 “난임도 질병으로 분류하는 만큼 난자나 수정란을 미리 동결하면 난임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비용이다. 난자 동결에 드는 비용은 병원마다, 채취한 난자 수에 따라 다르며 평균적으로 200~500만원 선이다. 보관 기간이 길수록 금액은 증가한다. 이에 정부는 내년부터 불임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 난자는 물론 정자 동결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시와 광주광역시는 난자 동결 시술비를 최대 200만원 지원한다. 그러나 지원이 없는 지자체가 대부분이고, 지원을 받아도 시술비 수백만원을 개인이 더 부담해야 한다. 주 부원장은 “지원이 이뤄지는 지역이 확대되고 있지만, 난자 동결 시술의 건강보험 편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며 “동결 보관을 하지 않더라도 출산을 원하는 부부라면 가임력 검사 등을 위해 병원을 찾는 게 좋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