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익숙하다. 이름 있는 병원이라면 만사 제치고 찾아간다. 인근에 텐트를 치고 밤샘을 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 병원에 들어가 집에 돌아오면 늦은 저녁이다. 한 번에 200만원 이상 지불해야 하는 시술비가 벅차 지원금을 더 준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고려한다. 그나마 일련의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들은 참아볼 수 있지만, 거듭되는 실패는 마음을 깎아내려 견디기 어렵다. 임신만 된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린 ‘난임 부부’다. 치료 과정은 우리에게 긴 ‘여정’이다. 어떤 이는 ‘마라톤’에 비유한다. 우리 부부의 여정을 쿠키뉴스를 통해 전한다. <편집자주> |
“주변에서 난임 문제로 이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해요.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왜 더 우울해지기만 하는 거냐면서요.” (이서현·가명·40대)
난임 부부들이 거듭되는 임신 실패로 인해 우울증을 겪는다. 스스로 자책하고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난임 시술을 여러 번 받은 고차수 부부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용 부담에 치료 중단을 고민하고, 서로를 탓하며 갈등하다가 관계에 금이 간다. 지지와 격려, 상담이 필요하지만 어디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막막하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난임 부부 지원 정책의 현황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난임 가족은 감정 기복, 우울 등을 호소한다. 지인들이 난임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고립감도 크다. 재단은 “난임 문제는 시술 결과와 상관없이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며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난임 당사자에 대한 심리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부부 단위 프로그램의 확대가 요구된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앓거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난임 부부들이 ‘난임·우울증 상담센터’를 찾길 권한다. 센터는 난임 부부를 비롯해 유산이나 사산을 경험한 부부, 임산부와 양육모, 배우자 등을 대상으로 심리 상담과 정서 지지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2017년 ‘모자보건법’ 개정을 통해 난임전문상담센터 설치·운영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 2018년 국립중앙의료원이 중앙 난임·우울증 상담센터로 지정됐다. 이후 △전남(현대여성아동병원) △인천(가천대 길병원) △대구(경북대병원) △경기(인구보건복지협회 경기도지회) △경북(안동의료원) △서울(강남세브란스병원) △경기 북부(동국대 일산병원) △경북 서부(김천의료원) △서울 서남(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에 권역 상담센터가 들어섰다.
상담센터에선 난임 부부와 임산부를 위해 심리 평가, 개인 심리 상담, 집단 프로그램 등이 운영되고 있다. 상담센터들은 지역 내 보건소, 난임 전문병원, 산부인과 의원, 산후조리원 등과 협약을 맺고 협력한다. ‘난임·임산부 심리상담센터’로 개편을 추진 중인 정부는 오는 2025년까지 권역별 센터를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인천권역 난임·우울증 상담센터장을 맡고 있는 전승주 가천대 길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검사를 통해 센터 내담자들 가운데 우울증 고위험군을 선별하고 어떤 상담이 필요한지 감별 절차를 거친다”라며 “고위험군 중엔 자살 위험이 높은 내담자도 있어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신속히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연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담센터의 실적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센터들의 상담 실적은 지난 2021년 3만278건으로 처음 3만건을 넘어선 이후 2022년 3만6862건, 2023년 3만9003건, 올해 3월까지 8788건을 기록했다.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상담을 위해 대기해야 하는 기간은 지난해 8월 기준 중앙 난임·우울증 상담센터의 경우 53.4일에 달한다. 같은 기간 전남은 7일, 대구 10일, 인천 5일, 경기 10일, 경북 9.6일로 나타났다.
센터는 정상 운영 시간 외 주말에도 부부 상담을 이어가거나 신청을 받아 단체 요가수업, 숲 체험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기도 한다. 전 교수는 “내담자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일정을 조정해 돕고 있다”면서 “난임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 배아이식 등 시술 과정을 정확히 이해시키기 위해 교육을 시행한다”고 설명했다.
난임 부부의 우울감이 심각하고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 약물 치료가 병행된다. 부센터장을 맡고 있는 조서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난임 부부의 관심은 오직 치료에 집중돼서 그 외 생활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해하며, ‘임신하지 못하면 인생이 끝이다’라는 인지 왜곡까지 일어난다”면서 “중등도 우울감을 보일 땐 약물 사용이 효과적인데, 약물 치료를 병행해 호전된 뒤 임신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료진과의 상담을 통해서는 충분한 정보를 얻기 힘들어 난임 관련 정보를 인터넷 카페 등 온라인에서 많이 접하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무분별한 잘못된 정보를 습득할 위험도 크다. 조 교수는 “심리적 어려움은 조기에 개입할수록 치료 효과가 좋다. 난임 치료 과정, 우울증 상담의 필요성 등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가 이뤄져야 한다”며 “난임 조기 선별을 통해 촘촘한 관리망을 구축하면서 환자가 부담 없이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단계별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난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도 요구된다. 난임의 원인은 남성·여성에게 모두 존재할 수 있지만 여전히 ‘난임 치료는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난임이라고 하면 부부 중 한 명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조 교수는 “난임은 배려 받고 지지 받아야 한다. 개인의 생각도 변화해야겠지만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되는 부분”이라며 “난임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난임 가족들이 임신과 출산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만끽하며 임신을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