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익숙하다. 이름 있는 병원이라면 만사 제치고 찾아간다. 인근에 텐트를 치고 밤샘을 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 병원에 들어가 집에 돌아오면 늦은 저녁이다. 한 번에 200만원 이상 지불해야 하는 시술비가 벅차 지원금을 더 준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고려한다. 그나마 일련의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들은 참아볼 수 있지만, 거듭되는 실패는 마음을 깎아내려 견디기 어렵다. 임신만 된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린 ‘난임 부부’다. 치료 과정은 우리에게 긴 ‘여정’이다. 어떤 이는 ‘마라톤’에 비유한다. 우리 부부의 여정을 쿠키뉴스를 통해 전한다. <편집자주> |
“난임 가족들은 한 병원만 다니지 않습니다. 용한 의사가 있다거나 배양 기술이 좋다는 곳이 있으면 그곳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유명한 한의원 앞에서 밤새 대기한 적도 두 번 있어요.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아이만 가질 수 있다면 어디든 갑니다.” (김지혜·가명·30대)
아이를 낳고 싶어 병원을 찾는 난임 가족이 늘고 있다. 난임은 피임을 하지 않은 부부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1년(여성 만 35세 이상은 6개월) 안에 임신하지 못하는 경우로 정의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2022년 난임 시술을 받은 부부는 14만458명이다. 여성이 7만6315명, 남성은 6만4143명이었다. 2018년 난임 시술을 받은 여성은 6만4922명이었다. 최근 5년간 17.5% 증가했다.
난임 부부는 앞으로 계속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불임·난임 진단을 받은 인구가 2018년 34만9000명에서 2022년 37만9000명으로 늘었다. 국내에선 부부 8쌍 중 1쌍이 난임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을 졸업해 취업에 매달리고, 주거 안정을 꿈꾸며 결혼을 늦추고, 경제 활동에 집중하다 보니 임신을 미룬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4세, 여성 31.5세로, 첫 아이 출산 연령이 평균 33.6세다. ‘40대 출산’은 더 이상 일부 임산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40대 초반 여성의 출산율(인구 1000명당 출생아 수)은 7.9명으로, 20대 초반 출산율(3.8명)의 두 배가 넘었다.
여성의 초경에서 폐경까지 가임 기간 동안 임신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을 뜻하는 가임력은 연령이 가장 크게 좌우한다. 여성의 가임력은 20대를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35세를 기점으로 급격히 떨어진다. 초혼 연령이 35세 이상인 기혼 여성 3명 중 1명은 난임을 경험한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도 있다. 연령이 가임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반증하듯 2022년 기준 불임·난임 클리닉을 찾은 14만458명 가운데 35~39세는 5만5063명으로 전체의 39.2%를 차지했다. 뒤이어 30~34세가 3만8572명(27.5%), 40~44세는 3만6568명(26.0%)으로 나타났다.
추세가 이렇다 보니 난임 시술을 받는 건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난임 전문의인 주창우 서울마리아병원 부원장은 “난임에 대해 지식이 없던 시절에는 여성에게 문제가 있어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현재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 원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늦게 결혼하면서 출산도 늦춰지다 보니까 임신 준비를 하려면 난임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시술할 수 있을 때 빨리 치료받는 게 좋다는 인식이 퍼졌다”며 “결혼한 뒤 얼마 안 있어 병원을 찾는 부부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
난임 부부들은 난임 병원에 희망을 건다. 하지만 난임 시술은 간단치 않다. 성공률은 연령 등 주어진 조건에 따라 개인별로 천차만별이다. 학계에선 난임 시술 성공률을 인공수정의 경우 15~20%, 체외수정은 30~35% 수준으로 보고 있다. 난임 시술은 인공수정과 체외수정(시험관) 시술로 구분한다.
인공수정은 여성의 배란기에 맞춰 배우자의 질 좋은 정액을 채취한 뒤 여성의 자궁 속으로 직접 주입하는 방법으로 환자에게 부담이 적은 편이다. 초음파 검사 등 준비 과정을 제외하면 실제 시술 시간은 10분가량으로 짧다. 체외수정은 말 그대로 부부의 난자와 정자를 몸 밖에서 수정시켜 자궁에 이식하는 시술이다. 채취한 정자와 난자를 시험관에서 수정·배양하기 때문에 ‘시험관 아기 시술’로 불린다. 인공수정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성공률은 상대적으로 높다.
문제는 비용이다. 지난 2022년 기준 난임 시술을 받은 여성 1인당 평균 진료비는 321만원으로 집계됐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여성 난임 진료비로만 9781억원이 쓰였다. 대한산부인과학회에 따르면 난임 부부의 평균 난임 시술 시도 횟수는 7회가량이다. 한 회 평균 180만원이 들어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난임 부부가 아이를 갖기 위해 시술비로 1260만원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사는 지역이나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난임 시술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이 확대됐다지만, 시술이 거듭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용은 여전히 부부들의 발목을 잡는다.
송수연 세종충남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난임 시술 지원을 늘려서 난임 부부들의 부담이 많이 덜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시술 비용을 보전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라며 “시험관 시술에 사용하는 약제들 대부분이 급여화됐지만 일부 주사제나 약품 등 비급여 항목은 거의 지원이 안 되고 있어서 시술 차수가 늘고 주사를 많이 써야 하는 경우라면 비용적인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난임을 남성 또는 여성의 ‘생식계 질병’으로 규정하고, 전 세계 성인 인구의 난임 평생유병률(평생 살면서 한 번 이상 난임을 경험하는 비율)을 17.5%로 추정했다. 국가 소득 규모나 환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난임 문제를 겪을 수 있다는 얘기다.
WHO 성·건강 보건연구 책임자인 파스칼 알로테이 박사는 지난해 펴낸 보고서를 통해 “수백만명이 난임 시술 이후 막대한 치료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치료 뒤 ‘의료 빈곤의 덫’에 빠지는 일이 잦다”고 지적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난임 치료 혜택을 확대하고 보건 연구·정책에서 난임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