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익숙하다. 이름 있는 병원이라면 만사 제치고 찾아간다. 인근에 텐트를 치고 밤샘을 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 병원에 들어가 집에 돌아오면 늦은 저녁이다. 한 번에 200만원 이상 지불해야 하는 시술비가 벅차 지원금을 더 준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고려한다. 그나마 일련의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들은 참아볼 수 있지만, 거듭되는 실패는 마음을 깎아내려 견디기 어렵다. 임신만 된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린 ‘난임 부부’다. 치료 과정은 우리에게 긴 ‘여정’이다. 어떤 이는 ‘마라톤’에 비유한다. 우리 부부의 여정을 쿠키뉴스를 통해 전한다. <편집자주> |
0.72명.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다. 역대 최저치이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국가 중 최하위였다. 마지노선이었던 세종시마저 0.97명으로 떨어지면서 전국 17개 시·도가 모두 1명을 밑돌았다. 올 상반기 국내 출생아 수는 11만7312명으로 1년 전보다 2.7% 감소했다.
이젠 다른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존립을 걱정할 지경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작년 말 ‘한국은 소멸하는가’란 칼럼에서 한국의 출생아 급감 양상에 대해 중세 유럽 인구 40%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을 능가하는 속도라고 평했다. 조앤 윌리엄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법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7월 방영된 교육방송(EBS) ‘다큐멘터리 K 인구대기획 초저출생’을 통해 “대한민국이 완전히 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우리나라가 아이를 낳지 않는 ‘출산 절벽’ 사회가 돼버린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0.72명이란 숫자는 젊은 청년들이 우리 기성세대에 보내는 성적표이자 경고입니다. 기성세대들이 아이를 낳기 힘든 환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죠.” 지난 15일 쿠키뉴스 가산동 사옥에서 기자와 만난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은 이같이 말했다.
청년들이 학업과 취업에 쫓기다가 늦게 결혼하고 있다. 돈과 주거 문제를 고민하며 출산을 미룬다. 그렇게 난임 부부가 된다. 저출산은 난임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아이 갖기가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가지려고 노력할 걸 그랬어요.” 이 차관이 난임 부부들과 간담회를 하며 가장 많이 듣는 사연이다. 저출산이라는 거대 담론 앞에 난임 문제는 일각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정부로선 소홀히 할 수 없는 정책 과제이다.
부부 10쌍 중 1쌍은 난임 시술로 아이를 출산할 만큼 난임 문제는 더 이상 남 일이 아니다. 이 차관도 난임을 직접 겪은 당사자다.
“난임 가족들은 여러 어려움을 경험해요. 저도 아이를 늦게 가졌어요. 1년 정도 애가 생기지 않으니까 주변에서 임신 얘기만 나오면 피하게 되더라고요. 난임 가족들은 상대방이 툭툭 던지는 말에 쉽게 상처 입어요. ‘왜 아직 아기가 없냐’, ‘난임의 원인이 뭐냐’, ‘남편에게 문제가 있냐’ 등의 말이 그렇습니다. 때론 관심이 큰 부담이 돼요.”
정부는 여러 난임 관련 정책을 펴내고 있다. 여성 1명당 25회(인공수정 5회·체외수정 20회)에 걸쳐 지원하던 난임 시술을 다음달부터 출산 1회당 25회로 확대한다. 또 연령에 따라 차등을 둔 난임 시술 건강보험 본인부담률은 30%로 일괄 조정한다. 이에 난임 시술 비용이 약 300만원이라면 45세 이상 본인부담액(건강보험 적용 후)은 약 150만원에서 90만원 수준으로 내려간다.
난임 예방을 위해선 생애 한 번 지원하던 난소기능검사(AMH)를 3번으로 늘린다. 이어 내년엔 자궁착상보조제, 유산방지제 등 난임 시술에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비급여 약제가 급여화 된다. 난임 휴가는 3일에서 6일로 연장된다. 특히 항암치료를 받거나 난소·고환절제 같은 영구적 가임력 손실이 우려되는 경우 난자·정자 동결 보존비를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해 7월엔 다둥이 부모 지원을 늘리기 위한 ‘난임·다둥이 맞춤형 지원 대책’을 발표하며 임신·출산 진료비 바우처 지원을 태아당 100만원씩으로 확대했다. 다둥이 임신부들이 임신 32주부터 근로시간을 단축하도록 근로기준법도 개정했다. 더불어 배우자의 출산휴가 기간을 기존 10일에서 15일(주말 포함 최대 21일)까지 늘렸다. 산후조리도우미는 아이당 1명씩 지원한다.
정부는 난임·우울증 상담센터를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상담센터에선 난임 부부와 임산부를 위해 심리 평가, 개인 심리 상담, 집단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18년 국립중앙의료원이 중앙 난임·우울증 상담센터로 지정됐으며, 이후 △전남(현대여성아동병원) △인천(가천대 길병원) △대구(경북대병원) △경기(인구보건복지협회 경기도지회) △경북(안동의료원) △서울(강남세브란스병원) △경기 북부(동국대 일산병원) △경북 서부(김천의료원) △서울 서남(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에 권역 상담센터가 들어섰다.
“난임은 아이가 안 생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겪는 심적 스트레스가 큽니다. 심각한 여러 정신적 고충이 있는 분들은 상담하고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난임·우울증 상담센터에서 충분히 상담해 드리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면 혼자 가슴에 담지 말고 털어놨으면 좋겠습니다.”
이 차관은 정부의 난임 대책의 목표에 대해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부부가 반드시 아이를 갖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난임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하겠다”고도 했다. 시술에 들어가는 비급여 비용까지 지원해야겠단 생각을 갖고 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겠다는 설명이다.
“난임 대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많아요. 대책 역시 중요하지만 난임 부부가 늘어나는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짚어봐야 합니다. 여성은 평균 31세에, 남성은 34세에 결혼하는데요. 결혼한 뒤 곧바로 아이를 갖는 가정은 전체의 5%에 불과합니다. 평균 결혼 나이에 1.5~2년을 더하면 그게 출산 연령입니다. 안정적 직장을 갖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때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가정이 많아요.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죠.”
이 차관은 한국의 난임 정책과 치료 환경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출산 한 번당 난임 시술 25회, 비급여 약제 건강보험 급여화, 난자·정자 동결 지원 등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면서 난임을 포함한 더 많은 저출산 해결 정책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출산율이 0.72명인 나라는 없어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가 비슷한 수준인데 그곳은 지금 전쟁 중이잖아요. 한국은 현재 유례없는 저출산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모든 노력을 다할 때입니다. 부족한 게 있다면 앞으로 더 개발해 나가겠습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들을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부부의 눈물이 행복의 웃음으로 바뀔 수 있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