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박주호 기자] 최근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갑(甲)질 논란’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땅콩회항’부터 불거진 갑질 논란은 백화점에서 주차요원을 무릎 꿇린 VIP 모녀, 수습사원 채용 갑질 등으로 확산됐다.
갑질 논란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자본의 횡포에 휘둘리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자본은 급격히 성장했음에도 이를 소비하는 사람의 인성과 품격이 뒷받침하지 못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갑(甲)’과 ‘을(乙)’이 그 어느 곳보다 명확히 나뉘는 기업은 어떨까.
최근 신세계는 올해 3월부터 팀장 이외의 모두에게 ‘파트너’라는 호칭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홈앤쇼핑은 올해 1월부터 주요 직책을 제외하고 나머지 임직원들을 ‘매니저’라고 칭하고 있다.
본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이름 대신 직급을 부르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부장님’, ‘과장님’으로 불러야지,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아주 무례한 것이고 조직문화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행위였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많은 기업들이 호칭 파괴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평적인 호칭을 사용하면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경직된 의사소통 체계를 파괴하기 위해 수평적 호칭을 처음 시작한 곳은 주요 대기업이다. CJ는 2000년부터 모든 임직원이 서로를 ‘님’으로 부른다. SK텔레콤은 주요 직책을 제외하고 나머지 임직원들을 ‘매니저’로 부르고 있다. 포스코의 경우 사원은 ‘어소시에이트’라고 부르고 대리부터 차장까지는 ‘매니저’로 통일시켰다. 한화그룹도 사원에는 ‘씨’, 대리~차장에는 ‘매니저’를 붙여 부른다. 비슷한 맥락으로 유한컴벌리와 아모레퍼시픽도 모든 직원을 ‘님’이라고 부른다.
영어 호칭을 쓰는 D사의 A(36)씨는 “호칭의 차이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느냐다. 영어 이름만 부를 때는 상대방의 연차나 직급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토론 시에도 상하관계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며 수평적 호칭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보였다.
매스컴, IT 업종은 호칭 파괴가 더 두드러지는 업종이다. 제일기획은 2010년부터 전 직원을 ‘프로’라고 부른다. 지난해 10월 합병한 다음카카오는 전 카카오의 호칭 방식, 즉 영어 이름을 임의로 만들어 부르는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넥슨코리아는 지난해부터 전 임직원이 서로를 직급 대신 ‘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직급체계가 단순한 언론방송사는 승진이 늦을 수밖에 없다. 자리라고 해야 고작 차장, 부장. 국장 정도다. 입사 후 주임, 대리, 과장, 부장, 차장, 전무 같은 직급이 다양한 일반 회사에 비해 ‘~장’이라는 말을 듣기 힘든 경우가 많다. 때문에 대부분의 언론방송사는 ‘선배’라는 호칭이 일반적이다.
선배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곳은 출판업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출판물의 이정표를 담당하는 편집국 직원에게만 상하 직급 상관없이 ‘~씨’라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다.
주요 일간지 J사의 기자 K(31)씨는 “직책은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선배라는 위치는 결코 바뀔 수 없는 자리고 가치다. 언론사 특유의 선배라는 호칭이 매우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에는 수평적인 호칭을 쓰다가 다시 직급 체계를 부활시킨 기업도 더러 나오고 있다. KT는 그동안 팀장, 실장, 본부장 등 직급을 모두 ‘매니저’로 불러왔지만 최근 4년 반 만에 부활시켰다. 해태음료는 2007년 직함을 없애고 ‘선배’ 또는 ‘후배’라는 호칭만 사용하다가 다시 직급제를 부활시켰다
H제과 다니는 B(30)씨는 “업종의 특성에 따라 효율적이고 적절한 호칭 체계가 따로 있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직급대신 ‘님’을 사용할 경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고 위계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
종합HR기업 ㈜MJ플렉스 김시출 대표이사는 “호칭만 바꾼다고 수평적이고 상호 존중적인 문화가 저절로 정착되는 것은 아니다”며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각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그 문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pi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