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다니엘 기자] 대전의 한 중학교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초동대처 미흡’으로 증거채취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등 문제가 발생했지만 책임지는 담당처가 없어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대전 K중학교 성폭력 사건 당사자로 3년 반 동안 싸워 온 피해자 어머니 K씨는 사건 발생 직후 학교, 지원센터 등 관계처의 대응에 대해 “통탄할 일”이라 묘사했다.
K씨는 청와대 게시판과 국민신문고, 아고라 등에 ‘대통령님, 4대 악은 안녕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성폭력 발생하면 신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등의 게시물을 올렸지만 해결된 건 아무 것도 없다.
사건의 재구성
2012년 12월26일, 방학을 하루 앞두고 다운증후군·지적장애2급 등의 합병증을 앓아온 송하나(가명·당시 18세)양이 성추행을 당한 정황이 포착됐다.
송양의 진술에 따르면 수업 중 남학생 박영환(가명·당시 13세)군은 송양을 4층 화장실로 강제로 데리고 가 구타를 하고 속옷을 벗기는 등의 성폭력을 저질렀다. 당시 수업교사는 학부모 면담을 사유로 영화를 틀어놓고 교실을 비운 상태였다.
사건 직후 대질조사에서 송양은 “박군이 방광에 손을 박았다”고 진술했다. 이는 단어선택에 미숙한 송양이 1시간30분여의 시간 동안 내놓은 가장 유의미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학교측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지원센터는 증거채취를 위한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골든타임은 허무하게 지나갔다.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적용된다. 겉으로 드러난 뚜렷한 증거가 없어도 피해자의 진술을 근거로 모든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증거채취 등의 초동대처가 이뤄진다.
피해자는 48시간 내에 몸을 씻지 않고 옷도 그대로 보존하여 산부인과, 외과, 비뇨기과, 정신과 등에 가야한다.
담임교사 등 책임자는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하고 피해 장소나 정황을 사진으로 남기는 한편 피해자가 의료, 법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이러한 발 빠른 대처는 사건을 재구성할 직접증거를 확보할 뿐 아니라, 피해자의 신체와 정신적 안정에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응법을 아는 학부모는 많지 않다. 자녀가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된다는 전제 하에 이를 사전 시뮬레이팅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K씨 역시 사건 직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산부인과에 간 것은 사건 발생 후 두 달이 훌쩍 지난 뒤였고, 골든타임 증거채취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피해자는 있고 사건은 없었다
사건은 일어났을까? 대답은 꽤 명료하다. “모른다”
당시 화장실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은 이상 사건을 재구성할 단서는 없다. 48시간 안에 산부인과에 가야했지만 피해자측은 잘 몰랐다. 혈흔이 묻은 팬티 또한 허무하게 빨래통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건의 정황을 밝혀 줄 유의미한 근거들이 있다.
사건 발생 두 달 반가량 뒤 산부인과를 찾은 피해자는 “hymen(처녀막) 11시. 3시 방향으로 intact(온전) 해보이지 않음”이란 진단과 함께 성폭력 피해를 전제로 한 처방전을 받았다.
해당 사건에 대해 임상심리사는 ‘아동·장애인 성폭력 사건 전문가 의견서’에서 “조사자의 질문이나 태도로 인해 피해자의 진술이 오염, 유도 혹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며 “피해자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진술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자문을 내놓았다.
충남대 소아정신건강의학과는 “피해자가 성추행과 관련된 외상성 사건으로 추정되는 경험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다”면서 “증상이 비교적 오랜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향후 수개월 이상의 전문적인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렇듯 당시 상황에 대한 신빙성 있는 근거들이 존재하지만,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됐다. ‘직접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학교측, “성폭력 실체 없다” 자체 판단
원스톱 지원센터, 골든타임 내 방문에도 증거채취 의무 미이행
정부는 학교 폭력 사건에 대한 포괄적인 대응 차원에서 근 몇 년 사이 다각적인 창구를 마련했다. 학교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시 대응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제작·배포했고, 가해자 징계 등의 사안을 다루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도 각 학교마다 설치 근거를 뒀다.
아울러 수사, 의료, 법률, 상담 등 사건 발생 직후 조치를 일원화한 ‘원스톱 지원센터’도 지역단위로 설치했다.
하지만 K중학교 성폭력 사건은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어느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학교 측은 가정통신문과 웹 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학교폭력 사안처리 가이드북’, ‘아동성폭력 발생시 대응절차’ 등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홍보했다.
해당 자료 내용에서는 “성폭력 발생시 피해자 동의의무와 상관없이 수사기관에 반드시 신고해야 하며, 성폭력 관련기관 연계 시에는 피해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성폭력 피해가 의심되나 확실하지 않은 경우 여성긴급전화, 원스톱 지원센터에 연락하여 문의 및 상담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하지만 막상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학교의 대처는 건조했다.
담임교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자체 판단을 내린 뒤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
학교폭력 사건을 다루는 교내 핵심 창구인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는 두 차례 회의를 열었지만, 형식상 구색을 갖췄을 뿐 송양의 신체·정신적 피해, 초기대응 문제 등은 다루지 않았다. 또한 심리 과정에서 변호사 등 학폭위 소속 전문가는 모두 불참했고, 사건을 증언할 피해자 학생과 어머니에겐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황당한 통제도 했다.
당시 학생부장은 학폭위 회의록을 수사기관에 넘기는 과정에서 공문서변조 및 행사로 벌금 70만원 형을 받으며 의혹을 증폭시켰다.
학교 성폭력 사건의 수사, 의료, 법률지원을 단일 창구에서 처리한다는 야심찬 취지로 발족된 ‘원스톱 지원센터’는 오히려 피해자 측에 혼란만 가중시켰다.
송양과 어머니는 사건 다음날 원스톱 지원센터에 신고를 접수했지만, 이들은 피해자 학생에 대한 보호와 사건진상 규명보다는 절차상 처리에 초점을 맞췄다.
지원센터는 사건을 접수하고도 “이미 며칠이 지난 것 같다” “피해자측에서 고소를 취하한다며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추가적인 지원을 받길 원하지 않았다” “성 경험이 없는 피해자가 산부인과 의자에 앉는 것은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봤다” 등의 불확실한 핑계를 들어 산부인과 진료를 진행하지 않았다.
지원센터측 수사팀장은 “장애가 있는 미성년자를 다루는 건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며 “몸 속 DNA를 채취하기 때문에 의료적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학부모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여성가족부에서 발급한 ‘원스톱 지원센터 업무매뉴얼’에 따르면 “(피해자가) 법적조치를 취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도록 도움을 주고 동의를 얻어 여자 경찰관에게 이야기한다. 피해자가 당장 고발할 의사가 없다 하더라도 만일을 대비해 증거를 확보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피해자측은 지원센터로부터 산부인과 진료 제안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당시 K씨가 선임한 변호사는 “고소인(피해자측)이 센터에 상담 시 고소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적도 없고 단지 성폭행에 관한 상담을 구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의견을 얻고자 했다”며 “당시에는 고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으며 단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모든 신경을 썼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피해자가 지원센터에 방문한 건 사건 다음날이다. 증거채취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 48~70시간 이내였기에 ‘이미 며칠이 지났다’는 지원센터 측 증언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 처리 일원화의 취지가 무색하게 지원센터의 업무연계 또한 산발적이었다.
송양의 산부인과 진료 책임문제가 법정싸움으로 확대되자 담당 수사관과 심리사는 “의료지원은 간호사 내지 의료팀의 몫이다” “간호사에게 의료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하거나 알릴 의무가 있지 않다” 등의 발언으로 유명무실한 단일 창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 취재 결과 사건 당시엔 의료지원을 담당할 간호사가 공석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K씨는 “전문 기관에서 사건이 접수되면 주도적으로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증거를 확보하고, 성폭력을 당한 아이의 몸 상태가 어떤지를 살피는 게 정상 아니냐”며 “혼란을 줄이기 위해 지원센터를 만들었다는데 초기 대응에서 모든 게 어긋났다. 누굴 위한 건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당시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아마 대부분 피해자 학부모들도 그럴 것이다”면서, “(변호사 선임 등으로) 돈을 들이지 않고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dne@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