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다니엘 기자] 잉글랜드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빌 샹클리(1913~1981)는 이런 말을 한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
e스포츠의 모태로 여겨지는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는 e스포츠 종목으로는 유일하게 ‘클래스’를 말할 위상이 있다. 기반을 상실했다 여겨지는 브루드워 대회는 주류 e스포츠 종목 못지않게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현장의 열기와 온라인 시청자 수를 보면 이제는 고전이 돼버린 브루드워의 입지는 여전히 넓다.
22일 아프리카TV 스타크래프트 리그(ASL) 결승전이 열린 연세대학교 대강당은 팬들의 환호성으로 그득했다.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1500석 규모인 좌석은 진작 가득 찼고, 100여명의 인원이 통행로 사이사이에서 응원전을 펼치며 현장을 달궜다. 수용인원의 한계로 약 200여명의 팬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들은 인근 카페에서 스마트폰으로 경기를 지켜본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한 염보성 팬은 “근처 카페에서 경기를 보며 염깨비(염보성의 별명)의 우승을 기원하겠다”면서 남다른 애착을 드러냈다.
아프리카TV 집계에 따르면 이날 온라인 동시 시청자수는 23만 명에 달했다. 4강 이영호와 이제동의 ‘리쌍록’의 경우 35만 명 이상이 해당 경기를 시청했다. 이는 아프리카TV 자체 플랫폼을 포함해 글로벌 스트리밍 시청자수를 합산한 수치다.
이번 ASL 결승전 키워드는 ‘공중’이었다. 공중을 장악한 선수가 이겼고, 아닌 선수는 졌다. 그리고 공중을 장악한 건 이영호였다.
2세트 염보성은 레이스에 이은 배틀쿠르저 활용으로 승리를 거두며 결승 진출자다운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결승무대 경험이 풍부한 이영호의 노련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운영과 컨트롤 모두에서 앞선 이영호는 세트스코어 3대1로 브루드워 복귀 후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현장을 휘감은 전운과는 별도로 경기 후 두 선수는 나란히 서서 담소를 나눴다. 방송자키(BJ)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의 동료애가 엿보였다.
경기 후 이영호는 “상금은 보지 않았다. 우승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면서 “열심히 준비한 게 결과로 나온 것 같아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BJ로 전향한 뒤 수입에 대해서 그는 “지난해 기준 벌이는 선수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때그때 조금씩 다르다”고 전했다.
이영호는 팬들과 소통하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팬들과 대화하며 정말 즐겁게 게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정도 벌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날 결승전을 직관한 서수길 대표는 “아직 브루드워가 끝나지 않았음을 오늘 이 자리에서 실감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경기 후 무대에 올라 “브루드워 대회 확대를 위해 스폰서인 KT와 논의 중”이라면서 “이후 상금규모를 대폭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아울러 서 대표는 “브루드워로 팀전(구 프로리그)을 열겠다”고 약속했다.
아프리카TV는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 ‘마지막 호흡기’로 통한다. 앞서 방송 대회가 폐지된 뒤 황효진 스베누 대표가 소규모 브루드워 대회를 연 것도 이 플랫폼이었다.
두터운 팬덤은 e스포츠로서 명맥을 잇는 원동력이 된다. 이날 결승전에는 한국인 못지않게 많은 외국인들이 현장을 찾아 향수를 갈구했다.
팬들은 브루드워가 근래 나온 게임들에 비등하거나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 ‘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결승전 현장을 찾은 한 팬은 “브루드워를 언제 플레이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 됐지만 e스포츠 대회는 꾸준히 보고 있다”면서 “미국 메이저리그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보듯 브루드워는 시청하는 것만으로 여가생활이 될 정도로 잘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ASL 시즌1부터 모든 경기를 챙겨보고 있다는 팬은 “밸런스 패치가 조금만 더 정교하게 이뤄지면 완벽한 게임이 될 거라 본다”고 평했다.
20대 초반의 한 팬은 “브루드워를 접해 본 적은 없다. 오늘은 아는 형을 따라왔다”면서 “경기장 열기가 대단하다. 게임을 잘 몰라도 누가 이기고 있는지 보였다. 해설들이 설명을 잘 해줘서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4강 리쌍록에 이어 결승에서도 흥행가도를 달리자 브루드워의 ‘제2의 전성기’를 내다보는 시선이 상당하다. 그러나 e스포츠로서 가치를 가늠하기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택뱅리쌍’으로 정리되는 ASL의 흥행카드는 언젠가 허물어진다. 군 복무도 군 복무지만, 해당 종목의 유지를 위해선 신인의 유입을 통한 지속 가능한 경쟁체제가 갖춰져야 한다. 당장 브루드워 종목으로 신인을 기대하긴 힘들다. 연습과 보수를 보장하는 게임단이 재출범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일각에서는 스트리밍을 통한 수익 창출이 굳이 신인 발굴에 열을 올리지 않아도 대회유지의 근간이 될 거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고전화 된 게임의 e스포츠 명맥 유지의 성공적 사례는 바로 옆 나라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중국은 워크래프트 시리즈 팬층이 가장 두터운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이 중국에서 미증유의 대박을 친 건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2003년에 발매된 워크래프트3 프로즌 쓰론 대회가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 또한 팬들의 열렬한 응원이 한몫했다. ‘안드로 장’ 장재호는 여전히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게이머다. 워크래프트3 선수들은 스트리밍을 통한 수익창출로 안정적인 프로게이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브루드워 팬덤도 이에 못지않게 상당히 두텁다. 브루드워 e스포츠 대회가 중국과 비슷한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다.
채정원 본부장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ASL도 넓은 팬덤을 바탕으로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대회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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