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광진구에 사는 우모(54)씨는 자신이 즐겨보는 드라마가 ‘막장 드라마’로 불리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그는 SBS ‘아내의 유혹’에 대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는 드라마”라며 “솔직히 사는 것도 힘들고 별로 웃을 일도 없는데 이런 드라마라도 보는 재미가 있어야지”라고 말했다.
은평구에 사는 권모(28)씨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권씨는 “‘너는 내 운명’이나 ‘아내의 유혹’만 막장 드라마인가?”라고 반문하며 “‘에덴의 동쪽’이나 ‘스타의 연인’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 판타지를 다루고 있는 만큼 모든 드라마가 어느 정도 ‘막장’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막장 드라마는 무척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가장 쉬운 해석은 ‘말도 안 되는 드라마’다. 억지스러운 설정과 비현실적인 전개로 드라마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기자들의 소위 ‘발연기’가 더해지면 막장 드라마의 공식은 모두 갖춰진다.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자극적인 소재와 선정적인 아이템은 필수다.
△‘막장의 원조’ 임성한 작가=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일드라마의 ‘황제’ 임성한 작가의 작품에서였다. 임 작가는 MBC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 ‘온달왕자들’, ‘인어 아가씨’, ‘왕꽃 선녀님’, ‘아현동 마님’, SBS ‘하늘이시여’ 등 ‘히트상품’을 연이어 탄생시켰다. 시청자들은 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막장 드라마라는 비난을 퍼부었지만, 시청률은 40% 안팎의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실컷 욕 하면서도 열심히 본 것이다.
하지만 지난 1997년 MBC 베스트극장으로 데뷔한 임 작가의 초기 작품을 들여다보면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인지 의아할 정도로 막장 드라마와 거리가 멀다. 임 작가는 남녀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을 묘사하는 탁월한 능력과 함께 사회 이슈를 접근하는 독특한 화법을 선보인 탁월한 감각의 신인 작가로 평가받았다. 임 작가의 데뷔 초 단막극 극본은 왜 임 작가가 막장 드라마의 원조가 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비단 임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막장 드라마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지상파 일일드라마의 극본을 쓰는 작가들의 초기 작품들은 하나 같이 실험적인 작품성으로 가득차 있다. 시청자들이 낯선 억지스러운 설정과 비현실적인 전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자극적인 소재도 최대한 자제하는 신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대부분의 일일드라마 작가가 막장 드라마 공장장이 된 것은 시청률 1%에 목숨을 거는 지상파에서 ‘스타 작가’가 되기 위한 어떨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기 위해 작가들은 불륜과 이혼, 납치와 협박을 서슴치 않고 그려낸다. 혼외정사와 미혼모가 등장하는 것도 필수 아이템이다.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통속극을 그려내기 위해 작가들은 그야말로 손에 땀나게 극본을 쓴다.
시청률이란 단두대 앞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에서 일일드라마 작가들에게 최소한의 자존심을 강요하긴 무리다. 보통 30분 내외로 방영되는 일일드라마에서 작품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고, 일일드라마 뒤로 이어지는 지상파 뉴스 프로그램을 위해 낯뜨거운 호객행위도 해야 한다. 모두 시청률이 빚어낸 참극이다.
최소한의 연기력을 가진 연기자를 캐스팅하는 것도 일일드라마에선 어려운 이야기다. 스타들은 일주일 내내 촬영에 시달리는 일일드라마를 절대 반기지 않는다. 수십 억원이 들어가는 미니시리즈와는 달리 일일드라마의 제작비는 최저 수준이다. 유난히 편부와 편모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조금이라도 연기자 출연료를 아끼기 위한 방편이다. 만약 조금 이름값이 있는 스타가 출연한다면 작가들은 곧바로 시청률을 올려줘야 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주연이라는 타이틀을 상으로 안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욕들어야 대박난다…‘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시청률의 일희일비 쌍곡선을 그리는 일일드라마 작가의 고충은 막장 드라마로 귀결된다. 미국 드라마 ‘미드’, 일본 드라마 ‘일드’에 이어 막장 드라마를 줄인 ‘막드’라는 웃지 못할 신장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최근 시청자들이 ‘너는 내 운명’에 이어 막장 드라마라고 부르고 있는 ‘아내의 유혹’은 사실상 ‘막장의 유혹’이라고 해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시청자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다. 혼외정사를 통한 불륜이 이혼 코드로 연결되고 있는 가운데 배신과 복수의 날선 대립각이 마주치고 있다. 시청자들 입장에선 도무지 그냥 지나갈 수 없는 호객행위다.
자연히 시청률은 치솟을 수 밖에 없다. 지난해 11월 3일 11.9%의 시청률로 시작한 ‘아내의 유혹’은 12월 16일 20%를 돌파, 올해 1월 2일 31.2%에 이르렀다. 정확히 두 달만에 ‘아내의 유혹’은 무려 20%포인트의 시청률을 끌어 올렸다. 엄청난 시청률 페이스다.
시청자들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드라마’, ‘말이 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면서도 ‘빠른 전개와 복선이 탁월하다’, ‘다음 회가 기다려진다’며 매일 저녁 ‘아내의 유혹’을 기다리고 있다. 시청률 노예로 전락한 슬픈 작가들의 막장 드라마에 높은 시청률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가 한 관계자는 “솔직히 막장 드라마라고 비판을 받으면 받을 수록 시청률은 올라가게 된다”며 “일일드라마 제작진도 이 같은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 입장에선 오히려 막장 드라마라는 불명예가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지상파 일일드라마를 정상적인 위치로 되돌리는 생산적인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막장 드라마라도 있어야 삽니다=시청자들이 막장 드라마를 선호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도저히 안 볼 수 없을 정도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순수예술이 대중예술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클래식’이라는 한 귀퉁이로 밀려난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색다른 의견도 있다. 한 대중문화평론가는 “솔직히 지금 나라 경제도 어렵고, 일반 중장년층 시청자들이 재밌을 일이 없다”며 “그냥 30분 동안 멍하니 드라마에 빠져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의 사회학적 역할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보통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는 일일드라마는 주부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며 “우리나라 주부들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고부 간의 갈등, 남편의 외도 등에 대해 가상의 리얼리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과 전쟁’도 꾸준히 15%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주부들의 인생 자체가 막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온갖 고난과 희생의 역사”라면서 “일일드라마 정도를 보는 것 말고는 주부들이 스트레스 해소를 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시청자들이 ‘내가 만들어도 저것 보단 낫겠다’는 일종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막장 드라마를 보는 하나의 이유라는 견해도 있다. ‘어차피 드라마라는 것 자체가 전부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막장 드라마와 품격 드라마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웃기다’고 말하는 시청자도 있다.
여하간 막장 드라마는 안방극장에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오늘도 우리는 막장 드라마를 울고 웃으며 욕하면서 보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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