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생활 속에서 나오는 박대성의 그림은 뜻밖에도 강렬하다. 경주 보문단지 내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문화센터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소산 박대성 초대전’(30일까지)은 수묵이 얼마나 현대적일 수 있는지 펼쳐보인다. 힘찬 붓질과 진한 먹빛, 과감한 구도 등으로 보는 이들의 가슴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박대성은 경주에 엎드려 신라를 그린다. 남산자락에 한옥을 지어놓고 육식도 끊고 휴대전화도 없이 산다. 날이 밝으면 먹과 붓을 들고 날이 어두워지면 놓는다고 한다.
오래된 과거 속으로 들어가 앉은 박대성이 세계 미술계의 호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박대성의 그림은 미국 휴스턴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뮤지엄 등에 걸렸고, 내년 3월 뉴욕 초대전도 예정돼 있다. 해외 미술시장에 한국화 대작을 파는 거의 유일한 작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고요함과 강렬함, 수묵과 모던, 경주와 뉴욕, 신라와 세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무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둘을 꿰어내는 게 박대성 그림의 힘이다. 사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중학교도 다 마치지 못한 학력과 한 팔에 의수를 낀 채로 20대 나이에 중앙의 미술대전을 휩쓸었다. 가장 뒷자리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맨 앞자리로 뛰어오르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가장 새로운 것을 끄집어 낸다. 경이로운 비약이다. 그런데 그의 비약을 만드는 도약대가 뭔가 하면, 전통, 자연, 동양, 정신, 이런 것들이다.
“지금까지 내가 써먹고 있는 것은 다 스무 살 이전에 자연에서 느끼고 배운 겁니다. 배는 고팠지만 메뚜기 잡고 친구들이랑 멱 감으며 놀고 그랬던 거. 청년이 된 후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배운 건 별로 없어요. 필묵으로 끄집어 낼 게 없어요.”
“지식이 사람 잡는 수가 많아요. 경험은 지혜 쪽으로 가는 거죠. 내가 겪지 않고 남이 겪은 걸 달달 외우는 게 지식 아니에요? 그런 건 중요하게 써먹지 못해요. 산경험, 생경험이 중요하지.”
박대성은 또 “서양이라는 허구” “서양이라는 뚱딴지”라는 말을 종종 썼다. 국수주의, 혹은 복고주의의 혐의가 짙다. 그런데 그는 “내가 전통을 말하는 것은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 가장 세계적인 곳이 바로 경주”라는 그의 주장과 통한다.
“뉴욕에서 제 초대전을 마련한 큐레이터가 그러더군요. 앞으로는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한국화가가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동양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서양인들이 동양의 문화가 뭔지 관심을 갖고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 때 전세계에서 90여명의 이름난 큐레이터들이 한국에 왔어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찾아간 화가들이 누군지 아세요? 다 동양화 그리는 사람들이예요. 우리가 세계에 내놓을 것은 결국 우리 것이죠.”
할 말은 더 많다.
“몇 년 전 브룩클린에서 갔다가 미국 어린애들이 동양화를 그려서 전시하는 걸 봤어요. 낙관까지 만들어 찍었더군요.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지필묵이 사라졌어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전통에 대한 그의 확신은 남산 소나무처럼 단단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40년 넘게 경주를 그려온 그의 화업이야말로 한 인간이 역사에 바치는 최고의 경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왕릉들 사이에 누워 신라의 꿈을 꾸는 전통주의자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경주는 현대성이 부족하다”면서 “신라 천 년의 잠을 깨우는 뇌관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합니다. 전통을 바탕으로 모던을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늘 관심입니다. 그러려면 뭔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닫혀 있으면 썩어요.”
“절대화론(畵論)이란 건 없어요. 21세기에 걸맞은 조형언어를 창출해야 합니다. 저는 새로운 조형언어가 대중적 만족도, 세계의 공감, 이런 걸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현대미술은 대중을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이예요.”
박대성은 전통에 충실하고 혁신에 열려 있다. 이 모순을 견디는 과정에서 뇌관이 폭발하고, 과거에서 미래로 직진하는 비약이 일어난다. 그의 그림은 전통을 절대시하거나 혁신을 최고로 치는 양 극단을 피하는 좁은 길을 우직하며 걸어서 마침내 대중과 세계에 닿는다. 그것은 우리 전통문화가 가야 할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될만 하다.
박대성이 경주를 선택하면서 서울과 제도권을 버렸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허명이라도 건지려는 게 아니라면 예술가들이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아직도 서울에서 이름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면서 “설악산 한가운데에 있어도 내 일이 분명하면 전세계가 주목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전시회장 중앙에는 그가 “내가 평생 껴앉고 살아온 것들”이라고 말한 오래된 벼루와 먹, 붓, 화첩 등이 전시돼 있다. 지필묵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어린 관객들에게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되겠다. 벽에는 풀벌레 소리를 연상시키는 공감각적인 글씨가 걸려 있고, 꽃무늬 벽지보다 더 화려한 느낌을 주는 소나무 그림이 펼쳐져 있는가 하면, 사진을 찍은 것처럼 사실적인 도자기 그림도 보인다. 백자 그림 앞에서 그는 “리얼리티라는 것도 서양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우리도 가능하다,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이걸 일깨우고 싶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그럴 만했다.
경주시는 최근 ‘경주시립박대성미술관’(가칭) 건립 계획을 확정했다. ‘경주의 화가’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박대성은 여전히 현역이다. 그는 “지금이 한참 수확기”라며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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