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논공행상 소외된 친박, "찌라시 뿌려서라도 원조친박 제거해야""

"[전정희의 시사소설]논공행상 소외된 친박, "찌라시 뿌려서라도 원조친박 제거해야""

기사승인 2013-10-16 06:58:01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두무포(지금의 서울 옥수동 한강변) 봄꽃놀이를 가던 연산군은 춘정을 이기지 못하고 뒤따르던 흥청 중 미색 하나를 골랐다. 그러자 수행하던 장악원 악공 광희(廣熙)가 부리나케 앞서 가더니 광희문 밖 맞춤한 민가 열채를 비우게 하고 그 중 깨끗한 한 채를 골라 궁녀들을 시켜 치우게 했다. 연산이 사냥을 위해 금표를 쳤던 것과 같은 방식의 민가 약탈이었다. 민가 백성은 왕의 색정을 위해 소개됐다.

발정난 개가 된 연산이 민가에 들어섰다. 그리고 목화(임금의 신발)가 채 벗겨지지도 않았는데 댓돌을 딛고
마루로 올라섰다. 그만큼 급했다. 임금 뒤로 흥청 오월이가 바들바들 떨며 마당으로 따라 들어왔다. 둘은 안방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사립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안방 용자살문은 눈치 빠른 광희가 이미 닫아주었다.

“급하구나. 내 너의 뒤태를 보니 참을 수가 없구나. 벗을 것도 없다. 이리 오너라.”

“전하, 부끄럽사옵니다. 햇살이 들이쳐 차마…”

연산군은 흥청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당의 속으로 손을 넣어 치마끈을 풀었다. 몇 겹을 싸맸는지 흥청이 두어 번 몸을 돌고서야 붉은 치마가 방바닥에 꽃처럼 펼쳐졌다. 흥청은 검무 추듯 뱅그르르 돌았다.

연산은 용무늬가 선명한 융복을 벗지 않고 바지만 내렸다. 그리고 안방 이층장 쪽으로 흥청을 밀어 붙였다. 얼결에 밀린 흥청이 가슴 높이 쯤의 이층장 나비 장석 문고리를 잡고 중심을 잡았다.


“전하, 소녀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의관을 벗으셔요.”

연산은 그렇게 말하는 흥청의 엉덩이를 쥔 뒤 자신에게 당겼다.

“그럴 형편이 못된다. ‘이놈’이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네 엉덩이가 나비만큼이나 아름답구나.”

연산은 어느새 흥청의 속곳을 벗기고 흰나비 문양 같은 엉덩이를 탐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쑥 기물을 흥청 엉덩이 골진 곳에 들어 밀었다.

“아프옵…”

흥청은 말을 뱉다 말고 안으로 삼켰다. 성은은 입으면서, 군주의 이물이 내 한 몸을 찢는다 한들 입 밖으로 아프다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청은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오, 오…좋구나.”

연산이 신음을 거듭하자 흥청의 몸은 활 굽듯 굽어지더니 나비엉덩이를 점점 연산의 사타구니 쪽으로 내밀었다. 연산이 한결 수월한지 허리를 뒤로 빼어 앞뒤로 움직이길 거듭했다.

《권력자와 재벌을 위한 '흥청망청'》

연산의 민가 방사는 장녹수의 간살에서 비롯됐다.

“전하, 옛 말에도 황혼을 두려워 말고 즐거움을 다하라 하였습니다. 조선이 태평성대인데 조선의 주인이신 전하가 즐거워야 백성이 즐겁습니다.”

녹수는 작고 붉은 입으로 이렇게 임금을 녹였다. 임금이 봄날 경치 좋은 곳을 찾는 유산놀이 두무포 행차에서였다.

경복궁을 떠나기 앞서 녹수는 연산이 춘정을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봤다. 이들은 봄 햇살이 광화문 돌쩌귀를 데운 아침, 도성에서 가까운 명승 두모포로 출발했다.

이 무렵 연산의 유흥과 사치는 극에 달했다. 갑자사화와 무오사화를 거친 뒤 왕권을 견제할 세력은 전멸 상태였다. 절대 왕권이 굳혀진 것이다. 이에 연산은 넘치는 자신감으로 채홍사를 두고 자태 고운 여자를 뽑아 궁궐 기녀로 만든 뒤 여색잡기에 밤낮이 없었다. 이른바 궁궐 흥청이었다. 백성들은 "흥청망청한다"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격간도동(섹스중독, 일종의 정신병)이 있는 연산에게 ‘모험 없는 색정’은 날마다 수라상에 오르는 백김치 같았다.

“시답잖아. 뭐 쫓을 일이 있어야지. 사냥보다 못해.”

연산은 그렇게 투덜댔다. 그 무렵 채홍사 여논공이 도성 박씨부인 미모를 슬쩍 연산에게 흘렸다.

박씨부인은 한양 절색으로 선왕 성종 임금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다. 연산에게는 큰어머니뻘이었다.

연산은 박씨부인을 궁궐로 불렀다. 눈엣가시인 사간원(언론사 격)과 성균관(대학)도 없앴던 터라 신하들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됐다. 연산이 박씨부인에게 말했다.

“후실인 후실일 뿐입니다. 녹수가 대신들에게 그토록 천대 받은 것도 그의 어머니가 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녹수 부친이 양반인 것을 아실 것입니다. 녹수도 그러한데 그대는 그저 박씨부인일 뿐입니다. 나는 조선의 왕입니다. 따라서 그대는 내 백성이며, 내 여인일 뿐입니다. 내가 반한 여인일 뿐입니다. 결코 나의 큰어머니가 아닙니다. 아름답습니다. 진정 아름답습니다.”

연산은 그렇게 박씨부인을 범했다. 머리 좋은 여논공의 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연산의 격간도동을 눈치 채고 계략을 꾸며 박씨부인을 범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지금은 최대의 경제호황"》

녹수는 그런 연산의 황음을 말리기는커녕 도왔다. 녹수는 아이까지 뒀던 서른 가까운 유부녀였고 노비 출신인데다 박색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후궁(종3품 숙용)이 됐다는 것은 성은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녹수는 입 꾹 다물고 연산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였다.

녹수는 춤과 노래에 빼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궁궐에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연산도 임금만 아니었더라면 사당패(요즘 연예인 격)가 되어 노류장화 꺾기에 바빴을 인물이었다. 연산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어 녹수에게 강한 모성을 느꼈고, 녹수는 그 반대로 아버지를 잃어 연산에 부정을 느꼈다.

이날 유산놀이에서 연산은 용이 그려진 융복을 입고 백마를 탔다. 그 백마 옆을 녹수가 가마를 타고 쌍을 이뤄 나갔다. 녹수는 왕비나 진배없었다.

“전하, 제가 사설시조 한 수 읊어 올리지요. 이런 화창한 날 노래가 없어서 되겠습니까?”

“그런 영광이 어디 있겠나? 즐거움을 다해 보세.”

녹수가 가마 위에서 정좌하더니 목을 빼고 손을 모아 소리를 했다.

‘노세 노세 매양 장식 노세 낮도 놀고 밤도 노세/벽 위에 그린 황계 수탉이 뒷날개 탁탁 치며 긴 목을 느리워서 훼훼 쳐 울도록 노세 그려/ 인생이 아침 이슬이라 아니 놀고 어이하리’

그렇게 임금이 종로를 지날 때 피맛골로 피한 백성은 머리를 땅에 박고 행차가 끝나기만 바랬다. 하지만 수백 명의 흥청과 수행 종렬은 오랜 시간 끝 간 데가 없었다. 백성은 연산의 폭정과 황음에 저마다 종주먹을 쥐었으나 틀어쥔 왕권의 견고함은 종주먹과 상관없었다.



《칠순 노인들, 권력을 장악하다》

“이게 말이 됩니까? 훈구대신 저희만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그 많은 공을 세운 우리는 헌신짝 취급하다니요? 승정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격), 사간원 대사간(방통위원장 격), 소격서 영(令·민족화해협력범국민위원회 상임의장 격) 등은 고려장 지낼 분들 아닙니까? 목숨 내놓고 진성대군(중종)을 임금 만든 사람이 누군데 반정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렇게 빈둥빈둥 지내야 합니까! 세간에서 우리를 뭐라 하는 줄 아십니까? 파락호들이라 합니다. 정 이러신다면 집단행동도 불사하겠습니다.”

채홍사 여논공이 소격서 대감을 붙잡고 결기를 높였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논공행상이 이뤄지기는커녕 연산군 때 임명된 방백 등이 아직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여논공이었다.

삼백여명 수령 자리와 팔도방백 등 수많은 벼슬자리가 더디게 자리바꿈을 하고 있었다. 삼정승 자리는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일찍이 차지했다. 그리고 도승지 자리는 중종의 척신 이춘기가 맡았다.

여논공은 이춘기가 원로들을 삼정승으로 앉힌 뒤 생색만 낸다고 보았다. 반정에 성공하고 입신양명한 이는 그들 삼정승뿐이었다. 천불이 나는 일은 삼정승 모두 칠순이 넘었다는 것이다. 그 벼슬 해보았자 몇 해 남지 않아 반정공신들은 세력을 이룰 수 없었다. 공신 훈구파의 몰락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반면 이춘기를 중심으로 한 척신(원조 친박 격)은 공신(친박)을 교묘히 내려 앉히고 있었다.


“군기시 차석 신윤무조차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거사 당일 반정군이 무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비어 있는 관직이 그렇게 많은데 왜 우리를 그 자리에 낙하시키지 않는 겁니까? 벼슬자리가 실력으로 합니까? 실력? 애들 장난 같은 소리입니다. 임금이 열아홉살입니다. 솔직히 임금 실력으로 합니까?”

여논공이 제일 분개한 것은 전함사(한국공항공사 격) 도제조에 이석기가 임명된 일이었다. 포도청 포도대장(경찰청장) 출신이었던 그는 반정 때 아무런 공이 없었으나 단지 척신이라는 이유 하나로 임명됐다. 그 외에도 종부시(정부법무공단 격), 장원서(국립공원관리공단 격), 평시서(한국거래소 격) 수장 등도 척신 보은 인사라고 보았다.

여논공이 꼽는 주요 ‘거사공신(擧事功臣)’은 삼백여명 중 몇몇을 제외하곤 자신과 같이 ‘공신(空臣)’ 신세였다.

그런데도 거사 당일 자다가 나와 왕관을 쓴 중종은 칠삭둥이처럼 우왕좌왕하며 앞뒤 안 맞는 어명을 내리기 일쑤였다. 아직도 자신이 임금인지도 모르고 실수를 하곤 했다. 그는 그저 열아홉살 임금이었다.

그 유취 때문인지 승정원 도승지 이춘기가 어전에서 나가면 일어나 맞절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논공이 분에 겨워 말했다.


“연산군 신료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 등을 때려죽인 사람은 우리입니다. 손에 피 묻히며 정권 잡았는데 그 공을 엉뚱한 놈들이 덥석덥석 받아먹으니 열불 안 나겠습니까? 우리는 핫바지 입니까?”

《'찌라시' 뿌려서라도 '원박'을 제거하라》

여논공은 연산의 황음을 백성에게 알려 민심을 되돌아서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백성이라기보다 성리학으로 무장된 양반 민심이었다. ‘두무포 민가 금표 색정 사건’이 그가 폭로한 대표적 사건이었다.

또 하나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았다.

연산은 사냥 나갔을 때 짐승을 못 잡으면 박두전(연습용 화살)으로 민가 처녀를 쏘아 맞혔다. 그리고 그 처녀를 잡아 오도록 해 색욕을 채웠다. 연산은 박색이어도 물리치는 경우가 없었다. 살이 찌거나, 마마로 얼굴이 흉해도 정성을 다하는 연산이었다. 그는 꼭 늙은 소나무 아래서 처녀들을 능욕했다.

이 바람에 성은을 입고 싶은 일대 처녀들이 스스로 사냥터에 몰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두가 여논공이 소문내어 만든 결과였다.

여논공의 마지막 승부수는 박씨부인 겁간 유도였다. 박씨부인은 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박원종의 누이였다. 그리고 연산군에 능멸을 당한 박씨부인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도총부 도총관 박원종은 누이에 대한 복수를 꾸미고 성희안 유순정 등을 끌어 들여 거사를 준비했다.

《"전문성 있어야 공공기관장? 말이 웃을 일"》

여논공은 반정 성공 후 당연히 입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조 판서는 몰라도 장악원 제조(국립극장 격) 벼슬쯤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도 조정은 하세월이었다.

여논공은 소격서 당상에게 신세한탄을 끝낸 뒤 소격서 솟을대문을 나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 내가 전문성이 없다고? 그 늙은이 망령이 났구먼. 저는 전문성 있어서 소격서 당상 자리 차지했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늙은 말들이 당근 맛을 보더니 제 무덤을 파는구먼. 하긴 지들이야 앞날을 볼 처지들이 아니니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권력 앞에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라더니…우리가 뭉치면 인왕산을 무너뜨리는 걸 진정 모른단 말인가.”

여논공은 만만한 척신들부터 내려 앉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기수(오늘날 ‘찌라시’ 격)를 풀어 그들의 혼외 자식과 여색을 폭로할 계산을 세웠다. 그리고 전기수들이 모여 있는 청계천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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