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스몰토크] 태풍 하이옌으로 본 필리핀과 조선 & 마르코스와 박정희

[전정희의 스몰토크] 태풍 하이옌으로 본 필리핀과 조선 & 마르코스와 박정희

기사승인 2013-11-12 18:31:00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1. 우리 정부가 12일 태풍 피해를 입은 필리핀에 500만불(54억원)을 긴급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6·25참전국인 필리핀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이같이 결정한 것이지요.

2. 필리핀은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가 부러워하는 ‘동남아시아의 선진국’이었습니다. 필리핀은 근대 이후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으셨다고 보면 됩니다.

필리핀은 16세기 들어 알려지게 됐습니다.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을 발견한 것이지요. 이후 1898년까지 스페인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독립하나 싶었는데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지배했습니다. 이때 영어가 공용어가 되지요. 그러다 1942년 1월 일본군이 수도 마닐라를 점령했고 45년까지 일본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필리핀이 비로소 주권 국가가 된 것은 1946년 7월 4일이었습니다. 해방 후 막사이사이(재임 1953~1957)가 미국의 경제적 원조를 받아가며 나라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이승만 대통령과 같다고 봐야겠지요.

필리핀에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난 것은 65년 11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입니다. 바로 미국이 지원하는 민족당 출신 마르코스가 집권한 거죠. 그는 집권 후 효율적 세제 운영과 대외차관 유치로 국가재정을 안정시켰고 범죄자와 공산세력을 소탕했습니다. 세계 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든 69년까지 마르코스는 출중한 리더였습니다.

3. 60년대 서울 장충체육관과 현대사박물관(옛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을 아시아의 선진국 필리핀이 지워주었다는 얘기가 정설로 나도는 것도 당시 우리보다 3배 정도 높은 필리핀 경제력 때문이었습니다. 필리핀이 지어줬다기 보다 미국 요청에 의해 영어권인 필리핀 노동자(아니면 화이트 칼라)들이 피고용인으로 왔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여기에 60년대 농구스타 신동파 선수가 마닐라에서 열린 시합에서 필리핀 국민의 스타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상황이 라디오 우주중계(그때는 이렇게 표현했다)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필리핀은 우리보다 선진국이구나”하는 인식을 갖게 됐죠. 70년대 초 필리핀 가수 아낙등의 인기도 한 몫을 했습니다.


4. 마르코스와 박정희. 개발도상국가에서 걸출한 리더들이죠.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독재자라는 겁니다. 마르코스는 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년 간 독재자의 길을 걷습니다. 박정희도 같은 해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독재자의 길을 걷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적당한 시기
물러났더라면 구국의 영웅 됐겠지요.

하지만 독재의 길로 들어선 두 사람, 마르코스는 86년 하와이로 망명하고, 박정희는 79년 김재규의 총탄에 죽습니다.

5. 그런데 두 나라의 운명은 독재자가 죽은 후 다른 방향으로 나갑니다.

한국은 아시아의 경제대국이 되는 반면 필리핀은 민주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국민소득 수준이 우리의 10분의 1에 불과한 나라가 되고 맙니다. 왜? 이후 훌륭한 리더가 없어서?

아닙니다. 튼튼한 중산층이 엷어서 그렇습니다. 그들도 우리의 4·19,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현대사의 격변이 있었으나 빈부격차가 너무 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득권의 부패를 막지 못했던 거죠. 우리는 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피를 흘리며 부패를 막았습니다. 리더의 힘이 아니라 국민의 힘이었던 거죠.

6. 참, 필리핀과 관련해서 1909년 일진회장 이용구라는 자가 ‘한일합방성명서’라는 걸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필리핀 핑계를 댑니다.

‘삼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각하에게 의견 아뢰옵니다.…세계가 급변하여 이긴자는 흥하고 패한 자는 망하는데 이것은 하늘의 이치고 당연한 형세입니다.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이 멸망한 것이나 베트남, 타이가 기울게 된 것, 또 중국이 쇠퇴해진 까닭이 이것으로 기인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약 하루아침에 아세아의 평화와 여러 나라들의 균등한 세력이 파괴되어 우리 대한국의 지위가 뒤집혀지게 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흩어져 없어지고 사직이 빈 터가 되는 우환은 거울로 삼을 만한 교훈이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근래에 미얀마, 베트남, 자바, 필리핀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용구 등이 밤낮으로 크게 근심하면서 어쩔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 친일파 이용구와 이완용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며 나라 팔아먹고자 필리핀 핑계를 대는 거죠. 그때 필리핀은 독립영웅 호세 리살이 나타나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후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로 빠르게 흡수되던 때입니다.

7. 필리핀과 대한민국. 차이는 중산층이 두텁게 자리하고 있느냐 뿐이었습니다. 기후 조건이나 국민성은 비교대상이 안되겠지요. 우리나라가 요즘 중산층 붕괴 조짐이 보인답니다. 지난달 31일 한국은행이 국회에 제출한 ‘금융안정보고서’ 진단에 따른 것입니다. 한국 경제를 받치고 있던 베이비 부머 세대들, 집 하나 지키기도 힘들게 됐고요. 이들이 건전한 중산층이었는데 말이죠.

8. 필리핀은 이번 태풍으로 국민총생산(GDP)의 5%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이보다 1만2000명 이상의 떼죽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대적인 모금 캠페인을 벌여 그들을 도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두레 정신이 발휘되면 좋겠습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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