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필리핀 태풍 표류인 신원조차 파악 못해

[전정희의 시사소설]필리핀 태풍 표류인 신원조차 파악 못해

기사승인 2013-11-14 00:08:00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비변사 필리핀 태풍 표류인 신원 파악조차 못해(1) - 조선, 사해 정세에 까막눈]

“먹어. 먹어.”

나주목 나장 조팔득이 기이하게 생긴 사람에게 주먹밥을 챙겨 주며 말했다. 그러나 그니는 눈만 껌뻑껌벅할 뿐 선뜻 손을 내밀어 받지 못했다. 행여 받았다가 경을 칠까 두려워서였다. 그니는 제주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압송되던 배 안에서 선원들이 주는 밥 한덩이를 받아 먹다 놀림을 당했다.

“꼭 생긴 것이 원숭이 같지 아녀. 저 눈썹 좀 보드라고. 숯검댕이처럼 새카매. 저것이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이야. 흐미. 미쳐 불것네.”

그러면서 그 선원은 그니의 옷을 헤치고 살을 만졌다. 그러더니 사타구니 안으로 손을 쑥 넣어 불알을 잡는 것이었다.


“포! 포!(싫다!)”

“포? 뭐라는 겨…어구매. 찌깐 허네. 니 이것으로 거시기 해봤냐? 싸가지 없는 새끼. 근디 생각보다 엄청 부드럽네 잉. 어이, 니네 나라 계집년들도 이리 부드럽냐? 같이 표류하재 어째 사내새끼들만 표류하고 질알이여. 환장 허것다.”



<<태풍 피해 필리핀 표류인 제주 해안서 발견>>

그 사내는 여송국(呂宋國·필리핀) 태풍 피해 표류인 비래누에버와 그 일행 5명이었다. 그들은 순조 1년 가을(1801) 제주 해안에 쪽배를 타고 목숨 부지한 채 닿았다. 헤진 삼베옷(‘바롱’·필리핀 전통의상) 같은 홑옷 하나 걸친 것이 전부였다.

제주 목사 한정운은 이들을 거두고 묘당(‘의정부’·국무총리실 격)에 고한 뒤 품지를 기다렸다.

‘본주에 이국인 5명이 표류해 왔으나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 말이옵니다. 유구국(오키나와) 통사 경필진이란 자로 하여금 이들이 어느 나라 오랑캐인지 알아내도록 지시했으나 그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아 실패했나이다.’

<<국제 파트, 신원 파악조차 못해>>

의정부에서는 이에 비변사(국가정보원 격)를 투입했다. 비변사 당상(국가정보원장) 남일배는 제주 목사의 장계를 받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일배는 오랑캐를 한양으로 압송해 민심을 뒤바꿀 모의를 획책했다. 그가 낭청을 불러 지시했다.

“곧 있으면 제주 목사가 보낸 오랑캐 다섯 놈이 당도할 것이다. 지금 나주에 있는 모양이다. 표류인인데 전혀 말을 통하지 않는다. 유구 통사(통역)를 넣어도 알아내지 못했으니 조선 팔도에 그 놈들 말 알아들을 자가 없다. 네가 그놈들 조서를 꾸며라. 법국(프랑스)에서 정순왕후를 죽이러 온 자객이라고 말이다. 조선 천지에 법국이 조정하는 야소교 무리(좌파)가 들끓고 있으니 이 기회에 그 오랑캐 놈들을 이용해 섬멸하자.”

“예 당상 어른, 다만 형조(대검찰청)가 어깃장을 놓을까 걱정됩니다. 아직 시파(구 정권) 세력이 남아 있는지라…”

“뭐라? 그따위 생각으로 어떻게 정순왕후를 지킨단 말인가. 비변사가 할 일이 뭔가? 서학 도당 등을 없애 나라를 굳건히 하고 정순왕후와 어린 순조 임금을 보호하는 일 아닌가! 이건 도승지 어른(대통령 비서실장)께 이미 아뢴 책략이야. 똑바로 하게.”

“예, 당상 어른, 즉각 시행하겠습니다.”



<<남일배 여왕에 충성을 다하다>>

남일배는 머리 회전이 빨랐다. 사해 사정(국제 정세)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그는 비변사 당상으로서 사해 정세 파악보다 정순왕후 호위무사로서 더 열심이었다. 그해가 순조 1년이었고, 순조는 열 한살에 불과해 순조의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렴청정했다. 영조 비였던 정순왕후는 순조 뒤에 앉아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정순왕후는 선왕 정조가 시파를 등용하자 쥐죽은듯이 있다가 정조가 죽자마자 시파 척결에 나섰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가 벽파(현 정권) 좌장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잘 아는 남일배는 정조의 병세가 악화되자 밀서를 정순왕후에게 매일 전달했다. 조정에서 거론된 농담조차 그를 통해 정순왕후 손에 있었다. 그는 정조 임금 당시 병조판서였다. 정조가 그를 병조판서로 등용한 것은 무인의 질서가 정치권력에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판단에 따라 군 정실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군 최고 실력자인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는 정조 앞에서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때가 되자 보란 듯이 배신했다.


<<동북아 일본 영유권 분쟁, 중국 서부 반란에도 둔감>>

순조 무렵 사해는 청나라에 백련교도 난이 일어나고, 왜(倭)가 북해도를 정벌하고 있었다. 또 안남(베트남)에선 원복영(阮福映·구엔 푹안)이 통일을 이뤘다. 여송국에선 서반아(스페인)에 맞선 활발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변사 당상 남일배는 여송국 표류인 5명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조차 파악을 못했다. 그럴 의지 또한 없었다. 그들을 상국 청나라에 넘겨 청나라 황제로부터 칭찬을 듣는다면 그것으로서 할일을 다했다고 보았다. 천주교 박해를 하면서도 법국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그들이었다.

<<남일배, 필리핀 표류인 직접 심문>>

그해 10월. 남산 아래 비변사(옛 중앙정보부 자리 격)에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들린다 하여 민심이 흉흉했다. 남산 딸깍발이들은 그것이 비변사에서 고문하는 소리라는 걸 알았으나 입 뻥긋 했다간 어느 칼날에 죽을지 몰라 못들은 척했다.

내아에서 나온 남일배는 동헌 마당에 무릎 꿇은 표류인을 직접 심문했다.

“네 놈들이 법국의 야소교 교인이더냐?”

남일배의 얘기에 표류인들은 눈을 꿈벅꿈벅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다만 보았다.

“이런 불상놈들. 대답하란 말이다.”

“올라, 엥깐따도 데 꼬노쎄를레(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뭐여?”

낭청이 난처했던지 대신 대답했다.

“당상 어른과 같은 훌륭한 분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어찌됐든 야수는 아니로구나. 어험.”

“야소여서 그렇지 야수는 아닌 것 같사옵니다.”

남일배의 심문이 계속됐다.

“너희가 정순왕후를 죽이러 이곳까지 온 자들이냐? 조상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오랑캐들이 어찌 사람이더냐? 짐승만도 못한 놈들. 그런데도 되레 네 놈들이 여왕 마마를 죽이려해. 이런 육시럴 놈들.”

“아이 아끼 알군 메디꼬 오 엔페르메로?(여기 의사나 간호사가 있나요?)”

표류인 중엔 한양 압송 과정에서 나졸 육모방망이에 맞아 팔이 부러져 허벅지만큼 부어 오른 자가 있었다. 좌장인 듯한 비래누에버는 친구가 아프다며 의사를 찾았다.

이런 동문서답이 한나절이나 계속됐다. 중참이 다가오자 남일배는 더는 못 참겠는지 주리를 틀라고 명했다. 자객이 멀쩡하게 자백했다면 그것도 말이 아닐 듯싶어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다.

표류인들이 형틀에 묶였다.

“께 아 빠사도?(무슨 일이에요?)”

그들은 저항했다.

“노, 노, 노, 노! 소꼬로! 아유다!(사람 살려! 도와주세요!)”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필동 민가에 까지 들렸다. 그들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백성들은 남산 신당으로 몰려가 액을 물리쳐 달라고 빌었다. 귀신 소리로 들었던 것이다.

<<“내가 뭘 어쨌다고 야당이 저 난리란 말입니까?”>>

그해 11월 초순. 열한 살 소년 순조는 경연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반면 발 뒤에 정순왕후는 발 사이로 광선을 내뿜으며 대신들을 쏘아 봤다. 복(福)자와 수(壽)자가 새겨진 황원삼을 입은 정순왕후의 얼굴엔 독기가 가득했다. 시파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심해 뜻대로 되지 않자 미간을 늘 찌푸리고 다녔다.

이날 경연에 앞서 정순왕후는 남일배를 불러 다그쳤다.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시파 저 잡것들이 소를 그치지 않는단 말이오! 임금의 증조할머니가 나서면 안된다는 법이 대명률 어디에라도 있단 말이오! 벽파 대신들 임명한지가 일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런 잡소리 듣고 있자니 울화가 터져 어디 살겠소. 남 당상이 일거에 처리하세요.”

“전하, 송구하옵니다.”

남일배는 의도적으로 실수를 하며 전하라 불렀다.

“오늘 경연에서 맞춤한 교지가 이뤄질 수 있도록 경께서 손 봐 놓으세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kmib.co.kr

2부는 11월 15일 이어집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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