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광주 서부경찰서 강력계 사무실. 건물 신축공사 현장에서 상습적으로 건축자재를 훔쳐온 혐의(절도 등)로 경찰에 구속된 이모(26)씨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는 2013년 11월부터 최근까지 28차례에 걸쳐 광주 도심 곳곳의 공사현장에서 4500만원 상당의 구리 전선과 동 배관 등을 훔쳐 고물상에 팔아넘긴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최근 2~3년간 주로 인천과 경기도 건축현장을 돌며 인부 생활을 하던 이씨가 광주에 내려온 것은 지난 10월쯤. 비록 일가친척은 한 명도 없지만 고향인 전남 장흥 가까이에서 맘 편히 살고 싶었다.
모텔과 찜질방을 전전하던 이씨는 한 달여 만에 생활비가 바닥나자 직업소개소 등을 통해 일자리를 다시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변변한 자격증이 없는데다 건설경기까지 얼어붙어 여의치 않았다.
건설현장의 잡역부 취업마저 쉽지 않았고 은행통장의 잔고가 텅 비게 된 상황에 직면했다. 이씨는 결국 열심히 일한 응분의 대가를 받지 못할 바엔 ‘앙갚음을 하겠다’는 심정으로 건축자재를 하나 둘씩 훔쳐 내다팔기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크고 작은 건설현장에서 꾸준히 일해 온 탓에 별다른 보안장치 없이 건축자재를 현장 한 켠에 보관하는 인부들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이씨가 10대 후반부터 청춘을 바쳐온 공사현장에 뿌리 깊은 원한과 불만을 갖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체불 임금’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2~3개월 혹은 6개월 이상씩 고용돼 무거운 모래와 자갈을 나르고 벽돌을 쌓았지만 쥐꼬리만한 월급은 못 받은 적이 오히려 더 많았다.
이씨는 만 18세가 되던 2006년 보육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혼자 외롭게 생활을 꾸려오면서 평범한 월급쟁이를 꿈꿨지만 번번이 악덕업주들의 체불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월급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십장’으로 불리는 사장들은 갑자기 연락을 끊거나 원청업체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몇 달씩 지급을 미뤘습니다. 나중에는 부도가 났다고 체불을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노동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밀린 임금을 받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전혀 없었습니다.”
정상가격의 10~20%에 불과한 헐값에 훔쳐온 건축자재를 고물상에 넘겨 생계를 꾸리던 이씨의 비뚤어진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1일 밤 동천동 원룸 신축 공사장에서 훔친 에어컨 동파이프와 구리 전선 등 300만원 상당의 건축자재를 손수레에 싣고 가는 장면이 경찰이 확보한 CCTV에 포착돼 덜미를 잡힌 것이다.
경찰은 광주 서구지역 건설현장에서 건축자재 절도사건이 잇따르자 전담반을 편성하고 CCTV 추적과 잠복수사를 펼친 끝에 지난 7일 오후 광천동 한 PC방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던 이씨를 붙잡았다.
이씨는 “지금까지 악덕업자에 뜯긴 임금이 적어도 수천만 원에 달할 것”이라며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의 벽이 너무 높았다”고 눈물을 떨궜다.
광주서부경찰서 김용관 형사과장은 “절도 전과 2범인 이씨가 건설현장에서 적잖은 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아직 확인된 곳은 많지 않다”며 “체불임금의 피해가 많더라도 이씨가 저지른 절도사건은 법에 따라 엄벌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