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 소설 ‘기꾸야여관’(5)]
# 1942년 와탄강 너머 칠산바다
해자가 지켜주는 성읍, 집으로 가는 길
“푸드득”
저 앞에서 장끼 한 쌍이 날아올랐다. 혼자 걷기 심심했던 운이는 “미안해 미안해”라고 말했다.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동백꽃이 왼쪽에서 운이를 호위했다. 똑똑 떨어진 꽃망울을 밟을 새라 발끝을 보며 내딛었다. 동백나무 잎이 운이의 머릿결처럼 윤기 넘쳤다.
내리막 계곡물을 지나 가파른 길이 시작될 무렵 다시 봄바람이 그 골을 타고 은선암을 향해 올라갔다. 와탄강 수면은 그럴 때 마다 물결을 이루어 대덕산 쪽으로 바닷물을 밀어 올렸다. 그 바람은 집으로 향하는 뻘길을 조금씩 조금씩 먹어들어 갔다.
‘큰 일이네. 곧 어두워질 텐데…’
조바심이 난 운이는 이번엔 잔돌보다 먼저 발을 내 딛었으나 결코 떨어진 동백꽃잎 만은 밟지 않았다.
법성포 교회당 강습소에서 마촌 집까지는 십오 리 길이었다. 마촌은 노령산맥의 기개가 바다를 향해 단 한번의 주춤함도 없이 질주하다 서해를 만나 바다 속으로 장열하게 빠진 산맥 끝자락 대덕산이 유일하게 품어준 동네였다.
대덕산 골골 어느 쪽으로도 농사지을 평지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서해를 바라보고 왼쪽 골짜기, 그러니까 마촌에만 분지를 이루듯 논밭뙈기를 허용했다.
그 형세가 마치 갓난아기를 앞가슴에 안은 어미와 같아 대처 사람의 마실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대덕산 자락이 말 편자마냥 마촌을 감싸 마촌(馬村)이었다.
편자 안쪽으로 유일하게 트인 동구는 와탄강이었다. 그러나 강은 하루 두 번 밀물이 들어와 바다가 됐고, 하루 두 번 썰물이 되어 강이 되었다. 그때마다 넓은 뻘이 드러났다. 그 뻘에는 게와 망둥어가 지천이었다.
따라서 썰물이 되면 산길과 뻘길을 이용해 마촌을 드나들 수 있었다. 반대로 밀물이 되면 마촌은 견고한 성읍이 됐다. 물때에 맞춰 법성포에서 마촌까지 산길과 뻘길을 따라 걸어 들어오는 것은 동리 사람 아니고서는 제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또 다른 방법으론 밀물 때에 쪽배를 타고 들어오는 것인데 이 또한 물때 시간을 잘 모르는 외지인으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무턱대고 들어오다 썰물 뻘에 배가 갇혀 오도 가도 못하기 일쑤였다.
아니면 마촌 뒤 험준한 대덕산을 넘어 들어오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출발점이 신작로도 없는 오지여서 길도 제대로 없을 뿐더러 3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 길은 마촌 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닐 때나 이용했다.
마촌은 자연 해자(垓字)가 지켜주는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었다. (계속)
전정희 jhjeon2@naver.com/ 국민일보 문화부장, 종교기획부장, 종교부장, 인터넷뉴스부 장 등 역임. 인터넷 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을 국민일보 쿠키뉴스에 연재하고 있다. 저서 로 ‘민족주의자의 죽음’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공저), ‘TV에 반하다’ ‘아름다운
전원교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