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드디어 파리를 떠나는 날. 캐리어를 끌고 민박집을 나섭니다 다음 행선지는 스위스 취리히. 원래 예정에 없던 나라지만 친구의 초대로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경 됐습니다. 경험치가 쌓이는 나이가 되어 떠나는 배낭 여행은 ‘인맥’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됩니다. 현지인 친구들 덕에 기대 했던 것 이상의 다채로운 여행이 만들어지니까요.
파리에서 스위스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리옹역으로 가야 합니다. 역까지 전철로 가면 빠르겠지만 일부러 시간이 곱절이나 걸리는 버스를 타러 갑니다. 유럽에서 유독 느꼈던 것은 에스컬레이트나 엘리베이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지하철역도 대부분 계단이라서 여자 둘이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전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으니 버스를 선택한 것이죠. 마음 한편에서는 3일이라는 짧은 일정 탓에 더 보지 못한 아쉬움을 버스를 타고 보는 풍경으로라도 달래자는 이유도 있었지요.
리옹역 근처에서 스위스 친구들에게 줄 프랑스 사이더(사과와인)를 한 병 사고, 약국에 들러 프랑스에 오면 꼭 한 병 씩 사간다는 룩스 오일도 삽니다. 프랑스 고속철 TGV(떼제베)는 우리의 KTX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기차도 슬슬 출발하고 마침 점심 시간도 되어 숙소 근처 베이커리에서 산 갓 만들어진 빵과 슈퍼에서 산 치즈와 음료를 꺼내 간단히 끼니를 때웁니다.
그런데 열차 안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마구 들려옵니다. 어느 지자체에서 공무원 단체 연수를 온 모양이었습니다. 타지에서 모국어를 들으면 반갑다고 하는데 기차를 전세 낸 듯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에 선뜻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단체로 냄새가 강한 한식 도시락을 먹는데 주변의 다른 외국인들이 불편해 하지는 않는지 우리가 더 신경 쓰일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는 추세고 또 예전보다는 낯선(?) 냄새의 음식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분들이 내리고 난 뒤 좌석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도시락 쓰레기를 보니 한 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다른 승객이 타기 전에 얼른 쓰레기를 치우면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본’과 ‘배려’를 잊지 않는 여행을 하자는 다짐을 합니다.
창밖의 풍경이 회색 건물에서 점점 푸른 초원으로 바뀝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어느새 뜨문뜨문 나타나는 광고판에 프랑스어 대신 독일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스위스로 들어선 것입니다. 기분은 어디 지방 도시로 온듯한 느낌인데 벌써 다른 나라라니... 우리나라는 반도국인데다가 그나마 대륙과 연결된 길까지 막힌 상황이라 고립 된듯한 느낌을 받지만, 여러 나라가 이웃하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럽은 사람들의 열린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드디어 기차는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에 도착합니다. 경찰인 스위스 친구는 때마침 야간근무일이 겹쳐 내일이나 데리러 올 텐데, 그 전까지 하루 반나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살짝 고민이 됩니다. 갑자기 정해진 곳이라 사전 조사도 못했지만 일단 부딪혀 보자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기차에서 내립니다.
도착하자마자 다음 여정지인 크로아티아 까지 가는 야간 열차를 예약하러 갑니다. 인터넷으로 예약이 잘 되지 않아 현장에서 구입하기로 한 것인데요, 대기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려 매표창구로 갔는데 인터넷에서 예약하는 것과 금액 차이가 크게 나서 깜짝 놀랬습니다. 직원을 통해 표를 끊으면 수수료를 더 줘야 하는데요, 거의 저렴한 한 끼 식사 수준과 맞먹는 금액이었거든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 수수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기에 사무실에 비치된 피씨(PC)로 예약을 시도해 보았지만 계속 오류 메세지가 났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대기표를 끊고 창구 직원을 찾아 갔더니 그 10분 사이에 기차표는 무려 우리 돈 3만원 정도가 더 비싸진 상태였습니다. 창구 직원의 수수료까지 더 하자 거의 하루 숙박료를 지불 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돼버렸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자신은 전산망에 떠 있는 금액을 알려 줄 뿐이라는 젊은 남자직원은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겨우 그까짓 돈 차이 때문에 왜 그러냐’라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그까짓’이라는 그 돈을 아끼기 위해서 애를 쓰는 배낭여행자로써는 그 직원의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표를 사고 돌아섰습니다.
스위스가 유럽 중에서도 물가가 비싸다는 것도 익히 들었고, 여섯명이서 나눠 쓰는 도미토리 게스트 하우스 비용이 다른 나라의 작은 호텔방 수준이라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물가가 비싼 만큼 인건비도 비싸다는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물가 쇼크는 기차역을 나서자 마자 또 한 번 찾아옵니다. 게스트 하우스 웹사이트에는 기차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고 했지만 실제로 지도를 보니 캐리어를 끌고 걷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버스를 타면 세 정거장이어서 표를 끊으려고 봤더니 두 명 버스 비가 무려 우리 돈 7천원! 울며 겨자 먹기로 버스 티켓을 사고 취리히에서의 첫 버스에 올라탑니다. 그런데 기사도 버스티켓을 확인하지 않고 심지 티켓을 넣는 통도 따로 없습니다. ‘내릴 때 검사 하려나?’ 생각하고 다른 승객들을 지켜봤는데 전혀 확인 절차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버스 티켓을 검사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시내라도 다녀올라치면 고작 세 정거장 왕복에 만 5천원이나 되는 돈을 써야 하는데 표 검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니!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는 범죄의 충동이 마구 이는 상황이죠.
비싼 물가와 높은 인건비의 나라! 비싼 버스비를 매기고선 표는 검사도 안 하는 나라. 이 나라가 점점 더 궁금해졌습니다. 버스 밖 풍경을 유심히 보니 확실히 프랑스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길거리의 행인들도 왠지 모르게 여유롭고 도로의 차들도 서두르는 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취리히는 아담하고 차분했습니다. 비밀계좌로 유명한 스위스 중앙은행도 취리히에 있을 만큼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이만 도심 어디에도 대도시의 번잡함을 찾아 볼 수 없었죠.
묘한 첫인상을 간직한 채 드디어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역시 인건비가 비싸다 보니 게스트하우스의 리셉션이 따로 없고 1층에 있는 까페 직원이 리셉션까지 담당하더군요. 우리의 방은 3층, 하지만 역시나 엘리베이터는
없었습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낑낑대고 올라간 방은 빽빽하게 이층 침대 세 개가 들어선 코딱지만 한 방. 기차표 때문에 진 빼고, 충격적인 스위스 물가에 놀라고, 12만원을 주고도 빵 한 조각 조식도 없고 엘리베이터 없는 도미토리에서 자야 한다니… 벌써 해는 어둑어둑 지고 밖엔 소나기까지 한 차례 내립니다.
맥이 탁 풀려서 움직일 힘이 나지 않습니다. 첫날을 이렇게 숙소에서 보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비싼 버스비를 내고서라도 취리히의 야경을 보러 나가야 할까요? 일단 기력 회복을 위해 맥주 한 캔을 사기로 합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수입맥주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선 3천원, 묶음 할인으로 2500원이면 살 수 있는 맥주가 여기선 무려 6천원! 두 캔을 마신다는 느낌으로 한 모금 한 모금 소중히 알코올을 음미합니다.
과연 이 무시무시한 물가의 취리히에서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요?
글·사진 | 이선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