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취리히에서 머물 시간은 오늘 저녁과 내일 오전뿐이지만 해는 져가고 비는 내리고… 하지만 어서 나가 취리히와 만나보라며 격려를 하는 것 일까요. 밤새 내릴 것 같던 비가 그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미처 제대로 보지 못했던 시내에 나가기로 하고 나섭니다. 시내까지는 걸어서 20분. 짐 없이 걷기에는 괜찮은 거립니다만 조금만 더 있다가는 해가 질 것만 같습니다. 지금 이 검푸른 하늘이 딱 사진 찍기 좋은 타이밍인데… 나오자 마자 바로 고민에 빠집니다. 걸을까? 고작 3정거장에 밥 한끼 가격인 버스를 탈까?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겐 피할 수 없는 고민입니다.
그런데 고민하는 동안 버스 표 티켓 자판기를 가만히 보니 유레카! 24 시간 동안 쓸 수 있는 원데이 티켓을 팔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2번을 탈 가격으로 24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니! 게다가 표를 구입한 시점부터 24시간이라니! 파리에선 12시를 기점으로 하기 때문에 저녁에 원데이 티켓을 사면 몇 시간 사용을 못하거든요. 지금 끊으면 내일 오전까지도 맘 놓고 버스와 트램을 탈 수 있으니 원데이 티켓을 끊고 룰루랄라 신나는 마음으로 시내로 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앗! 중앙역에서도 처음부터 이걸 끊었으면 1만원을 아꼈을 텐데...’ 이럴 땐 빨리 잊어버리는 게 상책입니다.
무제한 티켓이 있다지만 가이드북 없이, 지도도 없이 어떻게 다니냐고요? 일단은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을 가는 거에요. 그리고 지도는 정류장마다 잘 그려져 있는 노선도를 참고 하고요. 스마트폰으로 노선도를 찍어두면 환승할 때 무척 편리합니다. 일단은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나갑니다. 중심지가 어딘지 어떻게 아냐고요? 노선도에서 가장 많은 노선이 교차하는 곳이 중심지 아닐까 한 거지요. 서울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여러 전철이 지나가는 환승역 주변은 늘 번화한 곳이니까요. 취리히 중앙역(HB)으로 노선이 몰려있고 또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뷔르클리 (B?rkliplatz)역이 여러 노선의 환승지인 것으로 보아 번화한 곳으로 추측, 이 두 곳을 기준으로 둘러보기로 합니다. 취리히에 대해 미리 조사는 못해왔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역시나 취리히 중앙역(HB)이 있는 반호프 광장(Bahnhofplatz)이 가장 번화한 곳처럼 보이네요. 취리히는 버스노선도 많지만 지상 위를 다니는 전철인 트램도 많이 다닙니다. 아주 오래된 트램부터 최신식 트램까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것이 오래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대도시와 공존하고 있는 취리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퐁듀(녹인 치즈에 꼬치에 끼운 음식을 찍어 먹는 스위스 전통음식)를 먹으면서 시내를 돌아다니는 퐁듀 트램도 있다고 해요. 딱 한 량 뿐인 고전적인 디자인의 트램 안에서 퐁듀를 먹는다니 스위스에서 한 번쯤은 해볼 만 할 것 같네요.
반호프 광장은 강가를 끼고 있어 더욱 운치가 있고 주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건물과 가로등에서 스며 나온 불빛은 강물에 반사되어 반 고흐 그림에 등장하는 붓 터치 같은 인상을 주었고요. 대도시에서 이런 여유를 느낄 줄이야… 적당히 현대적이면서도 옛 것을 포기하지 않은 취리히가 얼마나 매력적인 곳인 지 온몸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반호프 광장(Bahnhofplatz)에서 뷔르클리 광장(B?rkliplatz)까지는 ‘첨탑의 도시’라는 별칭에 꼭 맞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성당과 교회의 높은 첨탑이 강변 양쪽으로 우뚝 서있고 첨탑의 커다란 시계가 잘 보이도록 조명도 설치되어 있어 마치 잘 꾸며진 테마파크 속을 걷는 기분이 들더군요. 아침에 떠나온 프랑스 파리도 옛 건물들을 잘 보존한 도시지만 이곳과의 가장 큰 차이라면 단연코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이 독특한 분위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치 시계태엽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처럼 숨쉬고 말하고 걷는 템포까지 느릿느릿 바뀌어 버리는 이곳은 그저 ‘여유’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말이 달리 없을 것 같습니다. 전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나면 사람들은 횡단보도 신호 없이도 자유롭게 길을 건넙니다. 지나던 자동차도 얼마든지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양보 해줄 것만 같은 분위기, 세계적인 명품가게부터 작은 소품을 파는 곳까지 있을 것은 다 있지만 절대 과하게 화려하지 않은 메인 스트릿.
이곳의 분위기에 맞춰 우리의 걸음걸이도 덩달아 느려집니다. 부드러운 강바람을 맞고 걸어가며 이 아름다운 풍경을 지그시 바라봅니다. 분명 저 높은 첨탑들은 무척 유명한 이름의 관광지일 테지만 지금은 저곳이 어디인지 찾지 않기로 합니다. ‘공존’과 ‘여유’의 도시, 취리히. 아름다운 야경 속을 거니는 것으로 취리히와의 첫 인사를 대신합니다.
글·사진 | 이선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