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취리히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경찰이라서 어젯밤 야간근무를 섰던 스위스 친구 사비나는 오후쯤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했습니다. 취리히를 다시 돌아 볼 시간은 오전뿐이니 마음이 급해집니다. 어제 끊은 티켓으로 버스를 타고 반호프 광장(Bahnhofplatz)으로 갑니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남쪽으로는 약 1.4km에 이르는 반호프슈트라세(Bahnhofstrasse)가 나옵니다.
세계적인 명품 부티크샵을 포함해 보석상, 시계상 등 취리히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거리이지만 리마트강 건너편 구시가지까지 다 둘러보기엔 시간이 촉박해 둘 중 한 곳을 선택 해야 했습니다. 안 가본 신시가지냐, 어젯밤 야경을 보았던 구시가지냐? 잠깐을 망설이다 거침없이 다리를 건넙니다. 낮에 본 풍경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끌렸거든요.
반호프 광장에서 뷔르클리 광장까지는 4번과 15번 트램이 다니기 때문에 걸어가며 구시가지 구경을 하고 돌아올 땐 트램을 타기로 합니다. 로맨틱한 야경과 달리 낮의 구시가지는 왠지 모를 활기가 느껴집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리마트 강물은 생각보다 맑았고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들은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가이드북을 들고 다니면 목적지를 찍고 찾아 다니기 바쁠 테지만 책 없이 자유롭게 다니면 주변을 더욱 세심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강변을 걷다 보니 뭔가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천막도 있고 사람들도 그쪽으로 모이는 것 같고요.
가까이 다가가보니 공터에 파머스마켓이 열렸네요. 주말마다 반짝 열리는 시장인데, 직접 농사지은 채소며 과일, 직접 만든 햄이나 빵, 치즈를 살 수 있으니 사람들이 북적북적 할 수 밖에요. 간이 까페에선 어른들이 여유롭게 주말 브런치를 즐기고, 아이들은 도심에 등장한 회전목마 때문에 신이 났습니다.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찬찬히 시장을 둘러보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물건이 보입니다. 두 눈은 동그래지고 심장이 빨리 뜁니다. ‘세상에! 여기서 이걸 볼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어!!’ 마음 속으로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 스위스 친구 사비나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갈까 물어봤더니 대뜸 ‘김치’라고 답했거든요. ‘김치를 어떻게 가져가지? 파리의 한인 마켓에서 사갈까?’ 별 고민을 다했지만 파리에서도 일정이 빡빡해 그럴 시간이 안되더군요. ‘못 구하면 만들면 되지!’ 호기롭게 한인 민박집 사장님께 한국 고춧가루도 얻었지만 과연 스위스에서 배추를 구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정 안되면 양배추로 담자’ 하며 자포자기한 마음이었는데 세상에 여기 이 파머스마켓 채소가게에 배추를 떠~억 하니 파는 게 아닙니까. 중국배추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 배추를 얼른 사서 품에 꼭 안았습니다. ‘이거 사려고 여기가 오고 싶었나 보다’ 싶으면서 연신 싱글벙글 함박웃음이 떠나질 않고 발걸음에는 힘이 실립니다.
여유롭게 거닐다 보니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서둘러 높은 첨탑들을 보러 갑니다. 총 3개의 눈에 띄는 건물 중 가장 먼저 큰 규모의 쌍둥이 첨탑이 있는 곳은 대성당으로도 불리는 그로스뮌스터로 갑니다. 스위스 최대 규모의 성당이라고 하는데 첨탑 위를 올라가면 취리히의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실내에 들어가서 1층만 둘러보고 오기 쉬운데 지하에는 칼 대제 석상과 '츠빙글리 문(das Zwingliportal)'을 볼 수 있답니다. 큰 대로에서 대성당으로 바로 올라가는 것보다 작은 골목을 통해 가는 게 좋아요. 구시가지의 멋스러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과 가게들이 엽서에서 툭 튀어나온 풍경처럼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건너편에는 바로 프라우뮌스터 성당이 있습니다. 입구를 찾아 서성거리다가 보수 공사 중이라 포기하고 세 번 째 첨탑인 취리히 성 피터 교회(St Peter's Church in Zurich)로 향했습니다. 시간도 빠듯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나중에 프라우뮌스터의 유명한 스테인드글라스 이야기를 듣고는 많이 아쉽긴 했습니다. 그 스테인드글라스가 바로 인상파 화가인 샤갈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것이죠. 성 베드로 교회라고도 불리는 성 피터 교회는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탑으로 유명합니다. 바늘 길이가 3m정도 된다고 하니 어느 정도 크기인지 짐작이 되시죠?
사비나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 서둘러 숙소로 돌아갑니다. 야간근무를 서고 몇 시간 쉬지 못했을 텐데 친구를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그녀가 너무 반갑고 또 고맙습니다. 사비나는 6년 전에 캐나다 로키산맥 배낭여행자 그룹에서 만났는데 뭔가 잘 통해서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던 친구에요. 취리히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호르겐(horgen)에 살고 있어 이틀을 거기에서 보낼 예정입니다. 사비나의 차로 호르겐으로 가는 도중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취리히 호수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뷰포인트를 들립니다.
파란 취리히 호수와 넓게 펼쳐진 초록빛의 들판 풍경에 가슴이 탁 트입니다. 바람과 햇살 때문이기도 하지만 답답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눈시울이 촉촉해 지는 걸 느낍니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정말 아름다워…”하고 말했더니 사비나도 “I know.”라며 짧게 답합니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울타리에 기대어 한없이 풍경을 바라봅니다. 훗날 스위스를 떠올렸을 때 기억나는 장면이 지금 눈부시게 푸른 이 풍경이 아닐까 싶어 오래도록 눈에 가득 담아갑니다. 사비나가 어릴 적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쓴 요한나 슈피리가 살았던 히르첼(hirzel)이란 동네도 들리고 사비나의 말이 살고 있는 농장에도 들려 인사를 나눴습니다. 차 안에서 취리히 파머스마켓에서 산 배추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줬더니 사비나는 안 그래도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마트에 들리려고 했으니 김치 재료를 사자고 합니다. “Yeh! Kimchi!” 하고 소리치는 사비나, 더 신난 것 같습니다.
글·사진 | 이선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