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휴열의 생과 놀이, 삶의 ‘근원적 환희’ 위한 노래 - 김윤섭 미술평론가

유휴열의 생과 놀이, 삶의 ‘근원적 환희’ 위한 노래 - 김윤섭 미술평론가

기사승인 2016-06-24 18:41:56

유휴열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여 년 전이다. 당시 미술전문지 기자로서 전국을 돌며 국내 미술현장을 취재하는 것이 큰 비중이었다. 그중에 메인 담당지역이 전북이었다. 돌이켜보면 20대 중후반의 열정만을 앞세웠던 새내기 기자에게 ‘유휴열’은 작가 이상의 존재감이었다. 전북미술에 대한 해결사이자 ‘무조건 신뢰할 만한 통로 겸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상 깊었던 점은 전북지역 미술인들이 보여준 ‘유휴열 작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이었다. 원로ㆍ젊은 작가, 미술관련 기관, 미디어 매체, 주변 문화인 등에 이르기까지 신기할 정도로 유 작가를 믿고 따라주었다. 그때가 40대 중후반이었으니, 지난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다. 그런 모습은 지금까지도 어제처럼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금보성아트센터 작가상을 유휴열 화백이 수상한 것은 아주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단지 국내 최고 금액의 상금이어서가 아니다. 중견작가들에게 너무나 귀중한 의미와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 그 이유이다. 한평생을 바쳐 오로지 하나의 신념으로 매진한 그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해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한 상(償)이다.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는 처음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작품을 만들진 모르겠지만, 결국 그 작품의 수혜자는 작가 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예술품을 공공재(公共財)라고 한다. 유휴열 작가에 대한 시상은 바로 인류 유산으로 남길 만한 훌륭한 예술품들을 만들어 준 점에 대한 작은 보상인 셈이다. 유 작가의 매력 역시 캐면 캘수록 끝 모를 정도이다.

유휴열 작가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전주대학교 미술교육과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소질을 보였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세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첫 전시 장소는 전주의 다방이었다. 당시엔 지금은 없어진 금란다방이나 명다방이 주요 활동 무대였을 정도로, 변변한 갤러리 하나 없던 열악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유 작가는 괄목할 만한 화력(畵歷)을 보여준다. 이번 금보성아트센터 한국작가상을 비롯해 벨기에 BELGO 국제회화전 특별상(RUBENS상), 예술평론가협회 선정 최우수 작가상, 1997 MANIF서울국제아트페어 대상, 목정문화상, 전북대상(전북일보사) 등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전북도립미술관 전관에서 30여년 화업을 집대성한 초대전을 가졌다. 개관 10주년을 기념한 전시였다는 점에서 ‘유휴열 작가의 전북지역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유 화백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및 미술은행ㆍ서울시립미술관ㆍ부산시립미술관ㆍ광주시립미술관ㆍ전북도립미술관ㆍ호암미술관ㆍ금호미술관 등 국내의 대표적인 국공립 미술관에는 거의 다 소장되어 있다. 그만큼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도 비중이 높은 활동을 이어오고 있음이 증명되는 대목이다. 아마도 유휴열 작가가 화단에서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일관된 작가적 신념’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특정한 조형기법이나 재료, 장르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창의적인 실험정신을 들 수 있겠다. 그로 인해 ‘생(生)ㆍ놀이’라는 일관된 주제가 태어났다.

흔히 유휴열 작가의 작품을 ‘삶과 죽음, 기쁨과 고통, 흥과 한, 과거와 현재, 비움과 충만’ 등의 서로 상반된 개념이 혼재되었다고 해석한다. 그것은 서로 상충(相衝)되는 것이 아니라, 한 호흡으로 ‘상생적인 교감’을 이룬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품세계가 태동하고 피어난 곳이 지금의 모악산(母岳山), 일명 ‘엄뫼[어미산]’이란 점이다. 이 산의 이름은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연유한 것이다. 모악산엔 호남 4경에 꼽힐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고,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가 많다. 예로부터 80여개의 암자가 있었을 정도로 불교 미륵신앙(彌勒信仰)의 본산이자, 각종 신흥종교 집단지로도 정평이 나 있다. 유휴열 작가는 바로 이곳에서 30년 넘게 모악산 지킴이로 살고 있다.

화가가 안됐으면 무엇이 됐을까요? “난, 무당!” 왜요? “체질에 맞을 것 같아” 유 작가가 나고 자란 아주 작은 동네엔 실제로 무당도 살았고, 집안에 와서 굿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유년시절의 경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흥과 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셈이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그 생각은 안 해!” 특별한 이유라도? “너무나 고생했던 생각만 먼저 나니깐. 하지만, 그 젊은 날 고생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소.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감사하는 마음뿐이네.” 지금에 만족하는지? “서울 언저리에 있었으면, 이런 작업 못나왔을 것.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전주에서 작업한 것은 너무나 다행이고, 큰 행운이었지.”

유휴열 작가와 전주ㆍ모악산은 손등과 손바닥이다.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이며, 더 중하고 중하지 않다고 따질 계제가 아니다. 마치 모악산 기운은 그의 호흡이 되고, 그의 작품들은 전주가 품은 정신의 기록이 된 듯하다. 그래서일까, 유 작가의 작품은 실험적인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유독 무속적인 모티브가 넘친다. 그 작품의 시각적 비주얼은 국경을 넘나든다. 2012년 LA 개인전에서도 알루미늄 재료를 활용한 평면회화 바탕 위에 조소적인 방법을 차용해 크게 눈길을 끌었다. 현지 관람객의 작품에 대한 물음에 ‘동양 정신의 본성을 서양의 물성으로 융화시킨 작품’이라고 답했다 한다.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동양과 서양의 감성적 교감을 넘어, 정신과 물성의 융합까지 포괄하는 큰 그림이다.

더불어 작품의 중심 키워드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답한다. 유 작가의 관심사는 늘 ‘놀이’였다. 이 ‘놀이’라는 말에는 중의적인 개념이 혼재되어 있다. 놀이의 사전적 의미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활동’인 것처럼, 서로 다른 감성을 지닌 여러 사람이 한 마음으로 즐거워할 수 있긴 쉽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서로의 ‘喜ㆍ怒ㆍ哀ㆍ樂’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가능하다. 서로의 한(恨)을 공감하는 것은 ‘한국적 문화의 원형’으로 이해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로 시골의 농악ㆍ농요 등이 있다. 생활 속에서 흥(興)과 한(恨)이 한 몸처럼 뒤섞이는 과정은 또 있다. 바로 무속적인 요소들이다. 유 작가는 이미 80년대 초부터 싯김굿이나 상여의 매김소리 같은 것을 형상화 했다. 그것은 망자를 흥겹게 보내주는 의례였으며, 죽음과 생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주 특별한 놀이판이기도 하다.

유휴열 작가는 유독 작업과정을 중시하는 편이다. 그의 작품은 어떤 경우엔 일정한 틀의 구조적이거나 논리적인 측면으로 해석하려들수록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마치 시간을 요리하듯, 자신의 즉흥적인 느낌을 적절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것 같다. 꾸밈없는 농민들의 춤사위를 흙으로 주물러 만들거나, 아크릴 물감으로 푸석한 느낌을 살려내기도 한다. 결국 표현될 주인공 성격에 따라 제각각의 재료나 소재를 달리 선택한다. 그래서 시간대나 계절별로 작업하는 구역 혹은 섹션이 나뉘어져 있다. 회화ㆍ부조ㆍ입체ㆍ설치, 그때그때 마음 가는대로 쉼 없이 제 흥을 찾아 물 흐르듯 작업하는 것이 그만의 방식이다. 특별한 일 없으면 오전 6시에 일과를 시작해 오후 5시면 퇴근한다. 물론 작업실에서 그만의 룰에 맞춰 놀고 나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십니까?” 편의상 ‘화백’이란 호칭을 사용한다지만, 그에게 가장 난감한 질문 중 하나이다. 실제로 그는 화가이면서 조각가이고, 설치미술가면서도 소리꾼이다. 동ㆍ서양의 감성과 조형어법으로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켰다. 한과 흥을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생ㆍ놀이’ 연작은 삶의 고단함을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즉흥적인 춤사위를 입체로 구현한 토우와 순간적인 모션을 포착한 수많은 인체 드로잉, 생명력 넘치는 붓질의 향연…. 유휴열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시기에는 구상으로 가다가 또 어떤 시기에는 추상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유화와 아크릴 물감뿐만 아니라 한지와 흙, 나무 합판, 합성수지, 알루미늄 등 동시다발적인 전방위(全方位) 표현의 영역을 넘나든다. 멀티아티스트가 따로 없다.

유휴열 작가의 작품들에선 어떤 식으로든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보는 이에 따라 매우 다양한 감흥을 경험하게 된다. 아마도 그의 곁에 머무르는 이들―시인이나 소설가ㆍ음악가ㆍ춤꾼이나 소리꾼ㆍ연극인에 이르기까지―이 그것을 잘 증명해준다. 융합은 그의 화두인 셈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와 소통하는 샤머니즘(shamanism)적인 면, 모든 대상에 영(靈)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애니미즘(Animism) 세계관을 동시에 지녔다. 그래서 유휴열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소리와 가락은 인간 본연의 리듬이며 신명에 가깝다. 또한 물아일체 자연관의 노장사상, 범우주론까지 형상화한 흔적으로 가득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 그것은 유휴열의 삶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현실마저 작품세계와 일체화를 이뤄왔다. 유휴열이 부르는 ‘생(生)의 노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조현우 기자 akg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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