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경자 화백은 전남 고흥에서 1924년에 태어나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미대 동양화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9년에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수학했다. 그녀의 그림은 개인적인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독 등 아픈 마음을 승화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 받는다. 특히 곱고 섬세한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아 그림이 섬세한 편이며, 일본에서 공부했지만 우리나라의 고유한 멋과 미를 살린 그림으로 대한민국 미술의 자존감을 세웠으며, 피카소나 샤갈과 견줄 만큼 독특한 화풍으로 국내외에서 큰 사랑을 받아오던 대한민국 미술계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녀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는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동경 역에서 표를 분실해서 낭패를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표를 구해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 학생과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는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천 경자 화백은 평생 커피와 담배를 즐겼다고 한다. 그녀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줄 알아? 내 끼는 커피와 담배야. 그래도 이렇게 힘이 있지!" 그녀는 작품을 그릴 때면 언제나 커피와 담배를 곁에 두고 작업했다고 한다. 그녀는 시대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마치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처럼 밥은 안 먹도 커피는 마시는, 커피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화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년은 조금은 불행했다. 1991년 당시 천 경자 화백은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는데, "제목도 요상한 그림이 사우나탕에 있더라"는 내용이었다. 문제의 장소에는 '미인도'란 제목의 처음 보는 그림 인쇄물이 걸려 있었는데 작가의 이름이 천 경자였던 것이다. 그 인쇄물의 출처는 국립현대미술관이었다.
당시 문화부가 기획한 '움직이는 미술관' 정책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들로 순회 전시회를 열었고, 소장품 일부를 인쇄물로 복제 판매했다. 사우나탕에 걸린 인쇄물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장당 5만 원에 판매했던 복사본 900장 중 하나였던 것이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신 군부에 의해 김재규 前 중앙정보부장의 집에서 압수했다고 알려진 이 작품을 보고, 천 화백은 미인도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보는 부모는 없다”며 그녀는 자기 작품이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작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대한민국과 한국 미술계에 크게 실망을 하고 절필(絶筆)을 선언한다. 그리고 노년을 미국의 맨해튼 [Manhattan]의 딸의 집에서 보냈다. 그녀는 잠시 귀국하여 자신의 작품 중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2015년에 90세의 일기로 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작품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유족들은 이 그림의 진위여부를 2016년 11월 프랑스 감정업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에 의뢰해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천 화백의 차녀인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 대 교수는 자신이 쓴 책 '천 경자 코드'를 통해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전시하면서 ‘미인도’만은 작가의 이름을 빼고 전시함으로 판단을, 감상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겼다.
돌아오는 8월 6일은 커피와 담배를 사랑했던 위대한 화가, 천 경자 화백의 2주기 기일이다. 아름답고 위대했던 작가, 하지만 끝없이 고독하고 슬펐던 그녀를 추모한다.
글=최우성(인덕대 외래교수. 커피비평가협회(CCA) 서울 본부장, 웨슬리커피 LAB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