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여성혐오③] 가능성-관객 모두 준비됐는데, 작품만 없다

[한국영화의 여성혐오③] 가능성-관객 모두 준비됐는데, 작품만 없다

가능성-관객 모두 준비됐는데, 작품만 없다

기사승인 2017-10-08 00:00:00

2017년 하반기가 절반이 지났다. 올해 개봉을 예정했던 영화들 중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둔 것은 사실상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가 유일하다. 꼭 1000만 관객을 달성해야 좋은 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독 관객수가 박한 박스오피스이기도 했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올해 영화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데에 대표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 번째는 5월 실시된 제 19대 대통령선거다. 지난해부터 연이은 정치권 이슈와 함께한 대통령선거이니만큼 박스오피스에 가야 할 대중들의 관심이 대선에 쏠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한시적 문제이며, 영화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는 두 번째에 있다. 전문가들이 지적한 두 번째 이유는 유구한 서사의 반복과 독보적 캐릭터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2017년 1분기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들만 들여다봐도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월 대표 흥행 영화인 ‘공조’와 ‘더 킹’을 보자. 남자들이 나와서, 큰 사건을 해결한다는 골자다. 2월 개봉한 ‘조작된 도시’, ‘재심’과 ‘루시드 드림’도 비슷하다. 남자가 나와서, 사건을 해결한다. 3월 흥행한 ‘해빙’과 ‘프리즌’·‘원라인’까지 봐도 골자와 장르가 비슷하다. 범죄가 나오고, 검사·경찰·판사·변호사·교수·범죄자들이 나온다. 그리고 모두 남자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진 만큼 관객들의 내적 감수성도 상당해졌다. 그러다 보니 영화들이 관객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흥행을 고민하는 상업영화들은 관객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우선 순위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기존 흥행작들을 의식하고, 나아가 따라간다. 결국 남는 것은 고만고만한 범죄 시나리오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 이야기들이 분명 새로운 이야기임에도 이미 봤던 이야기라고 느낀다. 이에 더해 앞서 다룬 기획 2([한국영화의 여성혐오②] '프로불편러', 불편 감내하지 않는 관객들을 조롱 말라)에서 이른바 ‘프로불편러’들은 새로운 캐릭터의 부재를 지적하는 동시에, 여성의 부재 또한 문제로 제기한다. 영화에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 제시된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은 남자이고, 이는 일리 있는 지적이다.

영화들을 들여다보기 전에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 등장’의 기준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85년 앨리슨 벡델은 자신의 만화 ‘경계해야 할 레즈비언’(Dykes to watch out for)에서 영화 산업에 있어서의 성 차별, 특히나 여성이 적게 나타나는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벡델 테스트를 고안해내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해당 테스트의 조건은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최소 2명 포함할 것’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남성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것’ 등이다. 2017년 9월까지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중, 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비정규직 특수요원'과 '악녀' 단 두 개다.

2017년 9월 현재까지 1000만 관객을 동원해 최고 흥행의 자리에 올라있는 영화 ‘택시운전사’조차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 뒤를 잇는 780만 관객의 ‘공조’에는 여성 캐릭터가 거의 나오지 않고, 3위인 ‘더 킹’에도 관객이 인지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없다. 600만 관객을 동원한 ‘군함도’의 경우 여성 캐릭터들이 상당수 나오지만 이들끼리의 대화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한국 영화계가 여성혐오적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이쯤 되면 새로운 캐릭터의 부재 원인도 자연스레 짐작이 가능하다.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도 없는 영화시장에서 획기적이고 새로운 캐릭터가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영화들은 점점 진부해지고, 안전한 길만을 답습한다.

어떤 이들은 한국 영화의 주인공으로 여성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시장성이라고 지적한다. 영화 관객 중에는 여성이 큰 비율을 차지하는데, 여성들은 자연스레 이성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들에 호감을 갖고, 관람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제작자로서 가질 만한 생각은 아니다. 대부분의 관객에 대해 당연하게도 이성애자이며, 남성을 원한다고 단정 짓는 자세는 천편일률적인 영화의 시초밖에는 되지 않는다. 남성들은 남성이 히어로인 영화를 즐겁게 본다. 여성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과연 보고 싶지 않아 할까.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여성 배우들은 오늘도 시나리오가 없다는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한다. 배우 문소리는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없어 결국 스스로 ‘여배우는 오늘도’를 찍었다. 스크린 수가 40개도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해당 영화는 1만 관객을 동원했다. 나문희를 원톱으로 내세운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개봉 5일차에 100만 관객을 기록하며 호평 받았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관객들도 준비돼 있다. 작품이 없을 뿐이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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