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 삶을 모티브로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영화 ‘유리정원’(감독 신수원)은 한 여자의 삶을 통째로 훔친 무명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렸다. 정확히는 두 남자에게 인생의 희망을 빼앗긴 한 여자의 이야기다.
흔히 ‘푸른 피’라는 말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이들을 가리키지만 ‘유리정원’에서의 푸른 피는 조금 다르다. ‘유리정원’의 주인공 재연(문근영)은 자신이 나무에서 태어났다고 믿으며 푸른 피를 연구한다. 엽록소를 혈액에 배양시킨 인공혈액 ‘녹혈구’는 피 자체가 산소를 운반할 수 있다는 판타지적인 설정. 재연은 그 녹혈구를 이용해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킬 방법을 연구하는 과학도다. 그 연구는 12세 때 성장을 멈춘 재연의 한쪽 다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재연은 자신이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의 연구를 가지고 숲으로 도망친다.
마흔 두 살이 되도록 무명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지훈(김태훈)은 재연이 살던 방에 후임 세입자로 들어가 재연이 벽에 남겨놓은 글귀를 보게 된다. ‘나는 나무에서 태어났다’는 글귀에 매혹당한 지훈은 재연이 살고 있는 숲까지 찾아간다. 마음의 문을 닫은 재연에게 접근하기는 쉽지 않지만, 재연을 훔쳐보는 것은 쉽다. 지훈은 재연의 삶을 하루하루 훔쳐보며 글을 쓴다. 자신이 모르는 재연의 삶을 상상해 펼쳐낸 지훈의 글 ‘유리정원’에는 열광적인 독자들이 생겨나고, 지훈은 점점 재연의 삶을 적극적으로 훔치기 시작한다.
신수원 감독은 세상에서 버림받거나 외면당한 두 주인공을 통해 비뚤어진 인정욕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려낸다. 두 사람은 사랑받지 못했고 배신당했으며, 자신의 욕망 앞에 윤리를 저버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초록의 숲 속에서 홀로 살아가던 재연이 사실은 또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재연의 순수성은 광기로 돌변한다. ‘순수한 것은 오염되기 쉽다’는 영화 속 대사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재연은 문근영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배역이다. 아직도 아이처럼 순한 외모는 재연의 고집을 담아내기 충분하다. 중세 유럽에서는 숲에 홀로 사는, 혹은 숲이 주는 부산물들에 해박한 여자들을 마녀로 치부하고 화형에 처했다. 재연 또한 그 마녀들과 다르지 않다.
‘유리정원’은 제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남동철 프로그래머는 “한국 영화의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주는 영화”라고 개막작 선정이유를 밝혔다. 초록으로 가득한 싱그러운 화면들과 아름다운 연출이 그를 뒷받침한다. 다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던 다수의 한국영화들이 그랬듯, 흥행 여부는 미지수다. 오는 25일 개봉.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