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시의 시장 보궐선거에 집권여당 시장 후보로 지명된 경석(오만석). 유력 정치인인 장인 염정길(김학철)의 세력에 힘입은 그는 허리를 숙이는 데 익숙하다. 장인부터 수많은 정치인 앞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염정길 의원님 같은 정치인이 되겠다”고 외친다. 염 의원은 큰 일을 앞두고 경석에게 산 속의 제 별장에 비자금을 갖다 두라 지시한다. 장인이 여태까지 제게 맡긴 일 중 가장 개인적이고 민감한 일이라 예민해진 경석. 그 별장에 불륜 사이인 애인 지영(이은우)과 함께 찾아간 그는 별장 관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순태(지현우)앞에서 당황한다. 장인 어른의 귀에 자신의 불륜 사실이 들어갈까봐서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근처를 지나가던 여행객이라고 둘러댄다.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순태는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에게 식사라도 하고 가겠느냐고 권한다. 틈을 봐서 몰래 별장에 들어가 비자금만 숨기고 도망가려는 경석. 그러나 자꾸 일이 꼬인다. 그 와중에 경석의 치명적인 실수가 발각되며 순태는 경석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만, 이상하게도 경석은 사과하기가 싫다. 유력 정치인들 앞에서는 잘만 숙여지던 허리는 일개 별장 관리인 앞에서는 뻣뻣해진다.
‘살인소설’(감독 김진묵)은 한 편의 부조리극이다. 비리 정치인과 뇌물, 불륜과 갑질로 점철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사과하지 않기 위해 버티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서스펜스 스릴러를 표방했지만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민감한 일이라면서도 굳이 중요한 일에 자신의 불륜을 끼우는 경석, 경석과 불륜을 저지르며 대학 동창인 경석의 아내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지영, 접대와 뇌물이 일상인 데다가 윗사람들에게는 시종일관 미소로 대하지만 제 아랫사람들을 물건처럼 부리는 염 의원 등의 모습은 아이러니함 그 자체다. 염 의원의 딸인 지은에 이르면,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대사는 전형적이다 못해 웃음이 나온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극의 주춧돌이 되어야 할 순태의 존재다. 순태는 영화 전체에 걸쳐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풀어내지만 그가 했던 말들은 모두 극 후반에 가서 진실이 밝혀지며 힘을 잃는다. 그의 진짜 동기나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베일에 가려진 채 나오지 않는다. 103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순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등장인물들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해야할 일을 알려주지만, 정작 그가 욕망하는 것이나 그의 목적은 불분명하다.
서스펜스의 가장 큰 목적은 그 끝의 카타르시스다. 그러나 그 카타르시스가 ‘살인소설’에는 없다. 어떤 반전도, 숨겨진 진실도 없다. 스크린보다는 무대 위에 더 어울리는 극이다. 다만 경석 역을 맡은 오만석은 거짓말하고, 기고, 날고, 뛰며 극을 힘있게 이끈다. 그의 연기는 ‘살인소설’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악인들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살인소설’은 오는 25일 개봉한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