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악당들이야말로 가장 열심히 산다'고 평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목표만을 위해 달리기 때문이다. 매번 목표가 좌절되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 목표가 세계 멸망이고, 좌절시키는 것은 정의의 용사들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악당들이야말로 현대인의 가장 좋은 롤 모델이다.
이렇듯 열심히 사는 악당들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악당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영화 '토르' 시리즈의 대표적인 악당 로키(톰 히들스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톰 히들스턴은 그 덕분에 한국에만 벌써 세 번째 내한했다. 현재 개봉을 3일 앞둔(4월 22일 기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용산 IMAX '명당'자리 암표 가격은 최고가 10만 원. CGV측이 특수관 암표 거래 성행에 홈페이지 공지까지 내걸 정도니 말 다 했다. 관객들의 관심은 높아만 가고, 개봉 후 일주일간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특수관 티켓은 전부 매진됐다. 이같은 형상은 새로운 악당 타노스와 히어로들의 대결에 대한 기대를 방증한다.
그렇다면 악당들은 대체 왜 살까. 우리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악당들은 모두 "세계를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고, 용사들은 그에 맞서 지구를 구한다. 어릴 적에는 용사들에 이입해 환호했지만, 머리가 좀 큰 지금은 악당들의 이유가 궁금하다. 세상을 왜 멸망시키고 싶어 할까? 인류가 전부 말살되면 악당의 친구들도 죽어 버릴 텐데. 악당들은 혹시 "혼자 있고 싶으니 모두 나가달라"를 전 지구적 범위에서 시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혼자 죽을 수는 없으니 인류가 함께 자신과 죽어달라고 말하는 것일까? 악당들의 목표 뒤에 숨겨져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타노스는 전우주적 사랑꾼
타노스는 마블 사의 코믹스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악당으로 불린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메인 예고편에서 가모라는 타노스를 두고 "놈의 목적은 단 하나야. 우주의 절반을 쓸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피니티 스톤을 차지하면 손가락만 튕겨도 그것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대사를 통해 우리는 타노스가 어벤져스와 왜 맞붙을지 추측할 수 있다. 타노스는 어벤져스의 히어로들이 가지고 있는 여섯 개의 인피니티 스톤(스페이스 젬, 마인드 젬. 타임 젬, 소울 젬, 리얼리티 젬, 파워 젬)을 모아 인피니티 건틀릿(장갑)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물론 타노스가 알록달록한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놓고 "아, 예쁘다!"하고 보고 좋아하기 위해 인피니티 건틀릿을 완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타노스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히어로들도 웃으며 인피니티 스톤을 내어줄 수도 있다(이마에 위치한 인피니티 스톤 덕분에 움직일 수 있는 히어로, 비전은 예외겠지만). 타노스는 인피니티 건틀릿을 완성한 다음 전 우주에 존재하는 50%의 생명을 없애버리는 것이 목적이다.
"아니, 대체 왜?"
우리가 아는 악당들은 자고로 세계를 지배하고 싶어하지 않나? 전 우주의 생명을 50%나 없애버리면 그가 착취할 수 있는 자원도 반절이 줄어버리지 않을까? 착취에 효율을 따지는 것도 우습지만,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답은 원작에 있다. 마블 사에서 출시된 타노스 오리지널 코믹스에 따르면, 타노스는 '죽음'을 사랑한다. 관념적인 죽음을 쫓는 것이 아니다. 외계인, 초능력자, 신까지 등장하는 마블 히어로 세계에서 '죽음'이 지성을 가진 존재인 것은 당연하며, 타노스는 그 죽음을 성애적으로 사랑하는 것.
죽음은 타노스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증명해보라"고 말하고, 타노스는 전 우주의 생명 중 반에게 죽음을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죽음에게 증명하려는 목적을 추구한다. 어벤져스들로서는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사랑 놀음 두 번 하면 우주가 멸망할 스케일. 막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 악당들의 존재 의의는 결국 주인공 활약 위한 것
'사랑꾼' 타노스가 워낙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는 악당들은 적당히 납득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엑스맨'의 매그니토는 인간들에게 박해받는 뮤턴트들을 위해 인류의 문명을 파괴한다. 뮤턴트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원더 우먼'의 빌런 아레스는 본디 제우스에게서 태어난 전쟁의 신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의의다. '배트맨'의 조커는 인간 본연의 혼돈을 추구하며 파괴와 싸움 등 혼돈의 왕국을 만들고 싶어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벌처는 지구를 침공한 치타우리들의 기술을 훔쳐 무기를 개발한 후 그 무기를 다른 악당들에게 팔아먹는다.
물론 악당이라는 전제 하에서 납득 가능한 것이지, 평소에 주변에 둘 것이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인간 군상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받는다고 해서 남의 재산을 파괴하는 친구,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친구, 남이 싸우는데 박수쳐가며 좋아하는 친구나 무기 밀거래를 하는 친구를 두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악당들은 왜 존재할까. 당연하게도 그들의 존재 의의는 주인공의 대서사시를 완성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얄팍하고 2차원적인 악당은 곤란하다. 국내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8400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악당들이 납득 가능한 개별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견적서-슈퍼 히어로 편’의 자문을 맡았던 SF 소설가 dcdc는 악당의 존재 이유에 관해 무엇보다 독자들의 몰입감을 첫 번째로 꼽았다. "악당이 나이나 능력, 성격, 지위 등 주인공과 반대 항에 섬으로써 차이를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독자나 관객으로 하여금 둘이 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간에도 수많은 악당들이 태어나고 사라진다. 어쩌면 그 악당들을 보고 자신만의 악당을 만들어보고 싶은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위대한 악당을 만들기 위해 작가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엇일까. "관객이 가장 몰입할 수 있는 서사야말로 평범한 주인공이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보며 변화하는 것"이라고 밝힌 그는 작가들이 고려해야 할 악당의 필수요소로 "사회에 필요한 문제제기를 하는 악당"이라 꼽았다. 사회정의에 반한다기보다는 주인공과 독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시대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악당이 발생한다면 당신의 이야기도 자연스레 매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